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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피free dompea ce
Oct 20. 2024
나의 할아버지, 다니엘 2
아직 제목을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거실 커튼을 걷자 햇빛이 거실로 쏟아졌다.
지난 주에 사둔 달걀과 우유를 냉장고 아래 칸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새로 사온 달걀과 우유를 넣었다. 거실 창으로 길게 이어진 햇빛을 길잡이 삼아 커튼 옆으로 걸어가서 두팔로 무릎을 감싸고 앉았다. 빛 속에서 부유하는 먼지들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아래 칸 달걀과 우유로 점심을 먹고 저녁은, 저녁은 어떡해야 하나....먹고 갈까? 혹시 다니엘이 오지는 않을까...
무릎에 볼을 붙이고 소파를 보았다. 봄과 여름의 교차로 어디쯤에서 잃어버린 희수, 햇빛이 스민 회색 패브릭 소파의 어깨는 늦은 휴일 아침에 스크램블을 만들던 그의 어깨를 닮아 있었다. 깜빡 잠이 든 나를 감싸던 긴 팔과 가슴처럼 소파는 포근할 것 같았다.
돌아 올 남자와 떠나 버린 남자,
잃어버린 남자들을 생각하는 오후는 쓸쓸했다.
해가 기울면서 어둠의 경계를 넘은 햇빛 때문에 눈밑이 달아올라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맞은편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액자에는 다니엘의 고향 바다가 담겨 있었다. 다니엘이 직접 찍었다는 흑백 사진은 경계가 흐릿한 수평선 너머 어딘가에서 큰 파도가 다가오고 있을 것만 같았다.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카락처럼 나뭇잎같은 것들이 공중에 날리고 있었고 창백한 해변은 함부로 다룬 영수증처럼 거칠게 찢겨 있었다.
“네 증조부는 내가 고향을 얼른 떠나기를 바라셨다.”
“옛날 생각나시나 보네. 제가 모시고 다녀올까요?”
“아가, 이리 와보렴.”
다니엘은 서른 중반을 넘긴 나를 아직 ‘아가’라고 불렀다. 다니엘이 손으로 소파를 두드리며 한쪽으로 옮겨 앉았다.
“저 사진에 대해 내가 말해준 거 기억나니?”
“예. 40년도 더 전에 고향 떠나기 전날 찍은 바다라고...”
“그래. 맞다. 근데 아니야.”
아마 내 양 미간이 좁혀졌을게다. 다니엘이 두 엄지로 내 미간을 옆으로 펴며 미소 지었다.
“저건 내 고향 바다가 아니야. 그리고 우리 마을에는 저렇게 넓은 해변도 없어. 고기잡이 어선들이 정박하는 작은 항구가 다야.”
언제나처럼 나는 다니엘의 다음 말들을 차분히 기다렸다.
“나는 없는 것들을 있다고 하고, 있는 것들을 없다고 하며 살아왔다.”
다니엘은 내 눈을 지그시 들여다 보았다.
“너는 내가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 대한 사람이란다.”
“그래서, 저보고 이름을 부르라고 했어요?”
다니엘은 아무 말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네가 나를 다니엘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날부터 나는 너에게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말하겠다고 다짐했단다.”
“그럼, 저 사진은 어디에요?”
“그건 나도 모른다. 네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동해안 어딘가를 운전하다 찍은 사진이란다.”
“그런데, 왜 고향바다라고 했어요?”
“저건 내 몸이 기억하는 고향이야.”
다음 주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엄마에게 알려야 하나? 평상 시보다 더 길어지는 여행이 걱정이었다. 다니엘은 연락도 없이 훌쩍 여행을 떠났다가 걱정이 커질만 할 때쯤 돌아오곤 했다. 3일일 때도 있었고, 일주일을 넘겨 보름 가까이 집을 비우기도 했다. 이번처럼 한달을 넘기는 경우는 없었는데, 엄마는 할머니를 떠난 다니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머리는 경찰서를 향했지만 몸은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냈다. 올리브 기름을 두른 후라이 팬에 계란 두 개를 깨 넣자, 오래된 라디오 소리를 내며 흰자가 하얗게 익어갔다. 우유를 붓고 대나무 젓가락으로 노른자를 깨서 저으며 옅어지는 노란색을 바라보았다.
‘사진으로 이 순간을 기억할 수 있을까?’
단백질이 하얗게 익는 소리를, 뜨거운 후라이팬 위의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우유의 냄새를, 주황에서 개나리색으로 변해가는 이 순간을 사진에 담을 수 있을까?
희수가 떠나고 그의 사진을 모두 지운 것은 그를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더 잘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내 눈이, 내 손이, 내 뺨이....내 몸이 기억하는 그는 사진에 없었다. 자꾸만 낯설어지는 그를 사진에서 모두 지워버렸다.
식탁에 앉아 따뜻한 스크램블을 먹으며 다니엘의 말을 떠올렸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없는 것을 없는 그대로 받아 들이기 위해 여행을 간다.”
내 기억 속 희수가 사진에 없는 것처럼, 기억 속 희수도 현실에 없었던 거 아닐까? 무방비하게 흘리던 무료한 표정이, 한쪽 입꼬리에서 피어나던 냉소가, 할말을 삼키며 애써 짓던 웃음이 희수가 아니었을까? 있는 것에 눈을 감고 없는 것을 있다고 믿으며 지내온건 아닐까?
나는, 희수가 떠나고 남겨진 나에게서 비로소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