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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독따독 Aug 09. 2020

쉰두 살, 절망을 희망이라 쓴다

작품명은  '나'로 정했다.

2년 전 어느 밤, 아들이 밤늦게 들어와 잔소리 열전을 펼쳤다. 1시부터 시작한 대화는 새벽 4시를 넘겼다.


혹, 아들에게 향하는 엄마의 잔소리라고 생각했다면 아니다. 이미 사춘기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내 잔소리는 끝났다. 오히려 그때쯤부터는 애들로부터 두세 마디씩 잔소리를 듣는 날이면 합이 열 마디 이상을 듣고 있자니 오히려 내가 도망치고 싶은 날이 되었다.


별로 말이 없던 24살의 아들 이야기는 그날만큼은 작정을 한 듯했다.

“엄마는 우리에게 자기 주도 학습을 가르쳤잖아요.”

“그랬니? 피곤하겠다. 잘 자라.”

“엄마는 학과 공부를 가르치는 학원에 돈 쓰는 것보다 꿈을 키우는 교육에 돈을 쓰며 살았잖아.”, “아니야, 고3 부터는 엄청 썼어.”  

비몽사몽이던 나는 아들의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고 뜬금없는 답을 하고 들어가 자려고 했다. 치매이신 아버님이 새벽부터 밥 타령을 할 것이고 애들은 새벽부터 등교할 테니 들어가서 한 시간이라도 쓰러져 잘 생각이 가득했지만 아들의 결정타 한마디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런데, 할아버지랑 할머니를 위해 바쁘게 일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 참 그랬어요. 그건 엄마가 결정할 문제지만, 아무튼 난 그래.”

“그래, 내가 좀 그렇지.” 대충 대답할 정도의 대화가 아니란 걸 느꼈다. 늘 아들은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내려다봤고, 난 뒷수습에 급했었다.      

“엄마는 좋아하는 게 뭐야? 예전엔 꿈이 뭐였어요? 하고 싶었거나 여행하고 싶던 곳 그런 건 없었어?”

아들이 하는 이런 종류의 깊이 있는 말은 나를 긴장하게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는 자존심도 좀 상하고 쓰디쓰지만, 결국 시간이 흐르면 나를 돌아보게 하는 단 소리가 되었다.

 한 번이긴 했지만 커다란 덩치의 아들은 내 어깨에 기대어 목놓아 울었던 날도 있었다. 부모가 되어 돌보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내면 아이’를 만난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말을 뱉으며 함께 울었다. 아들은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듯하면서 복잡한  미로를 돌고 돌아 결국 나의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다양한 분야의 분들과 독서모임을 하던 아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중년 여성들은 시간을 풍요롭게 보내거나 자신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엄마는 그 흔한 운동조차 눈치보며 마음대로 못하는 삶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냐며 간병하는 엄마를 보고 있자니 ‘정말 엄마가 좋아서 하는 일일까? 엄마의 꿈은 현모양처였을까?’ 궁금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난 어미로서의 죄책감이 앞섰다. 마음껏 누리지 못하게 한 죄, 한창때인 스무네 살에 엄마 걱정을 하게 만든 죄였다.

구김살 없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자라지 못했다.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다니던 명문대를 그만두고 소설책에 파묻혔던 아이를 지켜보며 나는 완벽히 실패한 엄마라고 생각했다. 자식의 신중한 결정을 엄마의 실패로 여겼다니! 참 어리석었다. (지금은 본인의 삶에 애정을 품은 선택과 노력에 응원한다.)  본인의 미래도 막막해하던 아이가 나의 삶을 살피는 마음이 고맙기도 안쓰럽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뭘 하면 기분 좋아지지?     

딴 세상에 나란 사람이 한 명 더 있는 것 같았다.


이 나이에 그런 걸?


 그즈음엔 우울증 약을 먹고 있었다. 약 기운에 몽롱한 정신으로 노상 실수를 해댔다. 난 쓸모없고 가치 없는 인간이었다. 내 삶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이미 성과를 거두고 마무리 짓는 시점인데 나는 대가족이라 이름 붙인 타인을 위해 몸과 마음을 잿더미가 될때까지 연소시키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비교하지 말자면서도 문밖만 나서면 타인의 모습에서 대화에서 시선에서 비교를 껴안았고, 밤이 되어 어둠이 깊어지면 잠 못 들고, 슬픔의 골짜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당시 나는 묶인 몸이었기에 ‘고삐 풀린 자유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은 사치로 느껴졌다. 뜬금없이 ‘나답게를’ 시작한다는 게 너무 막연하여 혼자가 되었을 때는 목놓아 울기도 했다.


‘자유를 얻으면 또 뭘 하나? 난 이미 늙고 병들었는데!’ 영화 ‘빠삐용’에서 갑자기 자유를 맞이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끝을 택했던 ‘드가’가 떠올랐다.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도 자유가 주어진다면 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드가처럼 될 것 같은 두려움에 그와 동일시했다. 나를 쥐고 흔들던 시어머니가 만일 돌아가신다면 나는 그분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시어머니는 폭군이자 독재자였고, 신이었고 나를 좌지우지 흔드는 나의 모든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끝이라고 했던 지점이 시작 점이 될 것 이란 걸 몰랐다. 닫아놓았던 마음의 빗장을 조금씩 열고 나오니,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꼬리가 조금씩 길어지더니 동아줄이 되었다. 그 줄을 붙잡고 매달려 오르다가 미끄러지고 넘어졌다. 저 위에서 슥싹거리며 누군가 한 가닥씩 줄을 잘라내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의 동아줄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해졌다. 한 귀퉁이에서 시작된 생각은 줄을 잘라내는 저위 신 에게 한 마디씩 던지게 되었다. ‘하지 마. 좀 살자.’ 조금 더 있으면 폭풍이 지나겠지 했는데, 더 큰 고통이 닥쳤다. 그런데 안간힘을 다해 눈을 떴고 폭풍을 똑바로 봤다.  '폭풍의 중심'에 들어간 나는 오히려 평온해졌다. 이젠 끝이라 생각했는데 새로운 길이 펼쳐진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것?

가족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그것도 모자라 빵을 만들었다. 많을 때는 하루 여덟 번씩 밥상을 차리고 치우면서도 종일 빵과 과자를 구워댔다. 한 번에 쟁반 하나만큼도 안 되는 작은 오븐에서 서너 가지씩 구워대면서 신이 났었다.


내가 좋아하는 종목들은 타인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 타인이 웃으면 나도 기뻤다. 이제야 알았다. 나는 타인을 기쁘게 하는 걸 좋아했다. 그걸 알고 한동안 나에게 지긋지긋 해졌다. 그렇게 벗어나려고 했는데 결국 제자리라니.


 어느 비 오는 날 산책 길이었다.

베어나간 나무 등걸에 옹이가 패어있었고, 그 안에 물이 고여있었다. 그 물로 새들이 목을 축이고 있었다. 나무는 죽어서도 빗물 한 모금마저 아낌없이 주고 있었다. ‘타인을 위한 것이 뭐 그리 나빠? 주면서 행복했고 기쁜 거였잖아? 그 마음을 이용했던 사람들이 나쁜 거지.’


그랬다. 음식을 만들면 누구에게 줄까? 선물을 받으면 안쓰러운 사람이 생각나서 포장을 뜯지 못했다. 손수레에 젖은 박스를 가득 싣고 끌고 가는 할머니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누군가의 명령에 움직이면 앙금이 남았고, 상대의 거칠고 서툰 말이 생각 꼬리를 물고 늘어져선 생채기를 냈다.


하지만 기꺼이 하는 일은 내가 중심이 되었기에 벅차올랐고 뒤끝 없었다. 눈곱만큼 성장해서 돌아보니 내가 힘든 시간이라 생각했던 길은 ‘고된 보석 길’이었다. 타인에게 헌신한 걸 조금 나에게 나눠주면 되는 거였다.


시아버지의 기저귀를 갈면서도 우스개 소리를 하며 아버님의 자존심을 지켜드렸고, 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떠드리려고 노력했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는 비극을 받아들이는 마음 그릇에 따라 희극이 될 수도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스쳐간 시간들은 예쁘던 밉던 작은 결과물을 만들었고, 나만의 작품이 되었다. 이제는 손 때 묻은 작품을 닦아서 해 잘 드는 벽에 걸어놓을 준비를 해야겠다.


오늘도 많은 비가 쏟아진다. 역시 바람도 함께다. 그래, 너희들 덕분에 뜨거운 태양을 만나면 감사한 마음이다. 얼마든지 밀려와도 좋다. 받아주겠다.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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