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이 어려운 당신에게
의식도 조명처럼 밝기가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저녁에 운전하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어두우면 잘 보이지 않을뿐더러 거리감각도 떨어지고 보이는 반경도 줄어드나 봅니다. 눈처럼 의식도 밝음과 어두움이 있다고 합니다. 의식의 빛이 밝으면 긍정적인 것을 볼 수 있으나, 의식의 빛이 어두우면 볼 수 있는 게 적거나 왜곡된다는 것이죠. 바로 데이비드 호킨스가 지은 [의식혁명]에 나오는 이야기를 제 수준에서 정리해 본겁니다.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혁명]은 꼭 한번 읽어볼 책입니다. 내용이 어렵고 믿기 힘든 실험들도 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의 틀에 대해 놀랄만한 환기를 줍니다. 예를 들면 아래의 ‘의식의 지도’ 같은 겁니다.
이런 거죠. 어떤 사람은 의식의 수준이 20룩스여서 어둡습니다. 20룩스는 수치심에 머무르며,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수치스럽게 해석합니다. 멘탈모델이 그렇게 보도록 세팅된 것이죠. 의식의 수준이 500룩스 정도 되는 분은 세상을 '함께 공존하며 사랑을 나누고 베풀 곳'으로 바라봅니다.
혹시 느끼셨나요? 데이비드 호킨스는 우리가 ‘밝게 혹은 어둡게’ 보는 것이 먼저라는 겁니다. 즉 원인과 결과, 그러니까 인과에 대한 이해가 바뀐다는 겁니다. “저 사람이 나를 슬프게 했어!” 혹은 “이 환경이 두려워!”라고 말할 때, 원인이 ‘저 사람’과 ‘이 환경’이고, 그 원인으로 인해 내가 ‘슬프고 두려워졌다’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뒤바꿔진 순서라는 겁니다. 내가 슬프고 두려워진 시선과 패턴으로 본 것이 원인이고, 그 원인으로 인해 원치 않은 결과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공존’의 시선으로 봤기 때문에 공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100%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진짜로 ‘저 사람’ 때문에 내가 힘들어지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는 방식이 끌개가 되어 행운도 혹은 불행도 올 수 있음에 동의가 됩니다. 좀 더 살펴볼까요?
내 의식의 밝기만큼 세상을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부자들만 사는 동네에 허름한 옷차림의 노인이 벽에 기대어 서있습니다. 이 상황(결과)은 사람의 의식 수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됩니다. 20룩스의 수준을 가진 부자는 “어떻게 저런 차림의 노인이 이 동네에 들어올 수 있지?! 너무 수치스러워!”할 겁니다. 100룩스의 의식 수준을 가진 사람은 “도둑 아니야? 우리를 염탐하려고 온 걸꺼야! 너무 무서워!” 하며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500룩스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 해석할까요? 아마도 “오... 저분은 인생의 어떤 스토리가 있으실까? 내가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하며 바깥으로 나와 그 노인에게 말을 시킬지도 모릅니다.
경제적 수준이나 학벌과 상관없습니다. 높은 학벌과 경제적 수준을 달성했다 해도 낮은 의식 수준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위의 '의식의 지도'에서 보면, 200룩스를 기점으로 힘(Power)과 위력(Force)으로 나뉩니다. 힘(Power)의 특징은 겸손함이나, 위력(Force)의 특징은 오만함입니다. 힘은 끌어당기지만, 위력은 물리칩니다. 힘은 우리의 높은 본성에 호소하지만, 위력은 우리의 낮은 본성에 호소합니다. 힘에는 한계가 없지만, 위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200룩스 이상의 의식 수준을 가진 사람은 겸손과 공존을 통해 副를 만들지만, 175룩스 이하의 의식 수준을 가진 사람은 강압과 근심으로 副를 축적해왔을 수 있습니다
의식 수준은 부모를 포함해 성장과정에서 만들어진 틀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많고 늘 걱정을 하고 산다면 아이 또한 불안과 두려움을 자기의식의 틀로 가져갈 것입니다. 반대로 공존을 추구하는 부모 혹은 환경이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공존을 위한 방법을 찾아내려 했을 겁니다.
앞의 송 부사장님의 사례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드셨을 겁니다. ‘상사의 잘못일까, 아니면 부사장의 잘못일까, 아니면 둘의 상호작용이었을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들 말입니다. 사장님이 먼저 포용과 용기를 가지고 송 부사장을 감쌌더라면, 혹은 송부사장님이 포용을 통해 용서하며 공존을 갈망했다면, 결과는 좀 다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잘잘못을 따진다면 다람쥐 쳇바퀴가 되어 버립니다. 문제는 이제 어떤 시각으로 그 현상을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의식의 밝기를 어떻게 향상 시킬 수 있을까?
다행인 것은, 그 의식이 수준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상에 따라서 혹은 상황에 따라 의식 수준의 높낮이가 달라진다는 겁니다. 대개의 부모가 그렇듯 저도 자녀를 볼 때 매우 높은 의식 수준의 에너지를 씁니다. 기쁨과 사랑, 공존과 이해와 수용이 있습니다(물론 사춘기가 지났기에 가능합니다 ^^). 반면 어떤 사람을 볼 때는 매우 부정적이게 되기도 합니다.
앞서의 에피소드에 나오는 사장께서도 자신감이 넘쳤을 때는 더 높은 수준의 의식 에너지를 썼을 겁니다. 때때로 독불장군의 특성을 드러냈다 하더라도, 많은 순간에 수용과 공존의 환경을 만들었을 겁니다. 그런 멋진 분이 세상을 위협적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휘하의 임원에게 자신의 두려움을 자만심처럼 경솔하게 드러냅니다. 이 분의 마음이 다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송 부사장의 경우도 휘하 임원들과는 겸손함을 전제로 한 ‘이성과 자발성의 높은 의식 수준’으로 상호작용 했을 겁니다. 그런 분이 상사에 대해서는 자만심으로 대하지는 않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송 부사장께서 휘하 임원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장의 의도와 마음을 좀 더 헤아려 공존의 상태로 가기 위해 노력을 해볼 수 있습니다.
결국 생각한 것보다 우리가 더 높은 의식 수준에서 문제를 바라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다치면 위력(Force)을 쓰고 싶어 집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향해 혹은 어떤 상황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이 계속 올라온다면 재빨리 자신을 챙겨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위력(Force)이 다시 위력을 끌고 오기 때문입니다. 경쟁과 무시가 자신을 또 다른 경쟁과 고립에 넣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자신을 긍정적으로 중심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챙겨보십시오. 햇볕을 받으며 걷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세로토닌이 활성화가 되면 마음에 긍정성이 살아나니까요. 혹은 가장 자기 다운 그 모습으로 성공했던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면 술 한잔 하며 ‘라떼’ 이야기를 나눠보세요. 스러져가는 내가 아니라 아직도 왕성한 강점을 가진 나임을 스스로에게 들려주십시오. 의식과 관련된 책을 읽고, 자신이 지금 현재 세상을 어떤 틀로 바라보고 있는지 성찰해보십시오. 내가 어떤 자석을 쓰고 있고, 이 자석에 무엇이 붙어 있는지를 상상해 보는 겁니다.
마음에 여유가 좀 생긴다면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의식 에너지를 쓸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사랑과 이성과 포용의 에너지를 솟게 하는 상황과 사람과 여건은 무엇입니까? 파괴의 위력(Force)이 아닌, 겸손함의 힘(Power)으로 관계와 일터를 바꿔놓을 수 있는 내 안의 힘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내 의식을 점검해보는 오늘이 되길 소망합니다. 밝은 빛이 당신과 당신의 조직을 밝혀주길 소망합니다.
당신의 멋진 리더십을 응원합니다.
당신의 곁에서, 현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