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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영 글쓰기 Nov 01. 2017

소설 루시드(Lucid) - 미래의 흔적

이동영 초단편소설 (3화) - 10화 완결 예정

여자는 짐짓 모를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남자는 여자의 반응이 궁금해서 한참 동안이나 입술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입술은 피곤한 기색에도 핑크빛이 돌았다.


"조금 걷고 싶은데요."


둘은 조금 떨어져 나란히 걸었다. 봄날의 새벽은 둘만을 위해서만 따뜻한 것처럼 바람조차 찬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 순간 남자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다. 단지 이 신비한 여자와 대화를 더 나눠보고 싶었다. 모든 생명이 내려앉지만 본성 그대로 솟구치는 새벽의 힘은 강하다. 아침에 이불 킥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용기를 내고 이불 킥하는 편이 백번 낫다.


아까 남자의 생각을 읽은 건 우연이었을까? 남자는 너무 할 말이 많아서 침묵을 택했다. 몇 분째 말없이 걷던 둘은 가로등이 환하게 켜진 벤치에 앉았다. 여자가 먼저 벤치에 새겨진 낙서를 주제로 말을 시작했다.


"1년 전이었어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남자친구가 여기에 낙서를 새겼어요."


남자는 낙서를 보았다. 날짜와 함께 지워진 숫자들이 벤치 귀퉁이에 빼곡히 쓰여있었다.


"무슨 낙서예요?"


여자가 답했다.


"숫자들의 의미보다 이 숫자를 쓸 때 그가 괴로워하며 낙서를 멈추지 못한 장면이 생각나요. 안 쓰면 죽을 것 같다며 써내려 갔거든요."


남자는 순간 사이비 종교에 빠지거나 꽃뱀의 술수에 자처해서 따라와 결국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이 벤치에 신문지를 덮고 쪼그려 자는 자신을 끔찍하게 상상했다.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사람을 홀리는 무언가 있었다. 위험을 직감한 남자는 다급히 여자를 향해 외쳤다.


"저 솔직히 아까 그게 궁금해서 따라온 거라고요."


소심한 남자는 말해놓고 좀 미안했다. 이 새벽시간에 여자에게 동행을 제안한 명분으론 새삼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건 남자의 진실이었다. 여자는 사연이 있다는 낙서를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 숫자는 오늘 날짜, 그리고 당신의 생년월일, 당신과 만난 고속버스의 도착 시간이에요."


4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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