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책 <문장의 위로> 중
우리는 흔히들 착각하며 살아간다. ‘소유’에 대하여 말이다. 나와 함께 사는 고양이도 나의 ‘소유’는 아닐 것이며, 내가 사랑하는 여자친구 역시 나의 ‘소유’일 수는 없는 일이다. 이걸 이해했을 때 ‘버린다’는 동사를 원천적으로 지워버릴 수 있다.
소유, 즉 내 것이라고 이를 수 있는 것은 ‘대상화’할 수 있는 걸 말한다. 나만 쓰고 있는 젓가락이라던지 물컵, 헤어드라이기 등은 잠시동안의 내 것,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사용기간 중의 소유물이다.(고유의 것으로써 평생 내 것은 아니기에)
그러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나름의 주체를 지니고 있다. 나와 똑같이 말이다. 내가 아닌 타자가 나와 같은 주체로서 수용되어야지만이 소유의 관점이 아닌 존중과 이해의 눈높이가 가능해진다. 이것이 동등함이다. 어느 누구도 서로를 ‘소유’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사이가 건강한 관계가 아닐까 한다. 특히 ‘인간’관계에서는 더욱 필요한 인문학적 소양이다.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나와 타자를 ‘동일시’하면 타자에게 휘두르는 권력이 합리화되어 변질된다. 안희정 전 지사가 ‘합의에 의한 관계인 줄 알았다’고 말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병리적인 증상이다. 반대로 타자를 두고 주체가 없는 ‘대상’으로 삼으면 그것 역시 인간이나 생명을 ‘도구’로 이용하게 된다.
특이한 경우도 있다. 대상을 주체가 있는 타자로 이해하는 경우이다. 오타쿠라고도 하지만 요즘은 심형탁과 같은 배우로 인해 건전한 덕질 자체를 귀엽게(?)보고 인정하기도 한다.
또 히든싱어에 나와서 그 가수를 좋아하다 못해 모사를 하게 되는 열렬한 팬심 역시도 짠한 감동을 준다. 브라운관 속 연예인은 본래 비연예인인 우리들에게 ‘대상’에 가깝게 인식되는 게 보통의 전제이다. 그것이 선으로 가면 히든싱어가 되고, 악으로 흘러가면 ‘사생팬’이나 ‘악플러’들이 기승을 부리는 세태가 되는 것이다.
요즘 인문학 특강을 준비중인데,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 인문학 정신이 아닐까 한다. 인문학의 출발은 타자라는 낯설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부터니까. 살아가며 관계를 맺으며 상식선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생애 끝까지 ‘소유’한다는 것은 ‘나’ 말고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까지도.(이동영의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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