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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영 글쓰기 Nov 21. 2019

머무르지 않는 연습 ; 자기혁명

머무르다 : '더 나아가지 못하고 일정한 수준이나 범위에 그치다'의 준말

부모님 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전기 회사인데, 나름 열심히 했지만 난 정말이지 기계를 다루는 소질에 맞지 않았다. 태생이 문과 두뇌라서? 이과적 두뇌가 없어서였을까. 적어도 대한민국 교육 기준에선 그랬다. 리액션이나 피드백이 없는 판넬과의 대화는 내게 어쩐지 삭막했다. 그런 판넬을 무려 30년 넘게 설계하고, 설치하고, 공사까지 하는 전기 기술자 외길 30년 '달인'인생의 워커홀릭이 존재했으니. 바로 내 아버지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인터뷰처럼.

 

나: (무척 의아해하며)"아빠는 이 (전기) 일이 (진정...) 재밌으세요?"


아빠: (역시 의아해하며)"그럼, 아빠는 이 일이 (너무너무) 재밌."


나: (다시 의아해하며)"저는 재미없어요. 뭐가 재미있어요? 어떤 포인트에서 재미를 느끼시는 거예요?"


아빠: "아빠는 같은 판넬을 만들어도 도면 설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새롭게 만들거든. 거의 30년 넘게 이 일을 했지만 똑같은 도면이 하나도 없단다."


충격이었다. 와, 아빠. 아티스트였구나. 난 아티스트라 하면 그동안, 기타를 튕기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연기를 하거나, 붓을 들어 그림 속 세계를 창조해내거나 조각을 하거나 시, 소설을 쓰는 사람들만 무턱대고 생각했는데. 진정한 아티스트가 바로 내 곁에 있었다니. 난 비록 전기기술 관련 학원도 다니고 자격증에도 도전하며 무던히 애를 썼음에도 계속 새로워지는 기계들에 영 적응하지 못해 퇴사했다. 하지만 에피소드 하나만은 가슴에 남겼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지금, 이를 어느새 나의 '강의 철학'으로 단단히 삼았다.  


"단 한 번의 강의안도 똑같지 않게 하는 것'을 철학으로 삼아 매번 머무르지 않고 업데이트한 것이다. 사실 아빠 도면의 특징은 매번 더 나아지는 것만이 끝은 아니었다. '(수용자가) 이해하기 쉽고 보기 좋은' 도면이라는 점이 진짜 인정받는 전문가의 면모였던 거다. 나 역시 내 강의안은 '매번 달라지되, (수용자가) 이해하기 쉽고 보기 좋아야 한다'라는 목표를 가지고 완성도 높은 업데이트를 반복하는 중이다.

스마트폰이 스마트한 이유 중 하나는 자동 업데이트에 있다. 기기 한 번만 구입하면 정기적으로 버전업이 되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한다. 할 때마다 조금씩 오류가 수정되고 기능도 유저 중심으로 향상된다. 새로 나온 하드웨어로 당장 교체하지 않아도 쓰는데 큰 무리가 없을 만큼 이 업데이트는 유용하다. 나는 내 강의안이, 또한 내 책이 그런 업데이트로 수강생이란 유저를 위해 매번 업그레이드되도록 노력한다.


고이면, 썩는다. 흐르는 것은 살아있음의 방증이다. 흘러야 살아진다. 흘러야 살아남는다. 멈추고 고이는 순간, 편안하고 수월한 그 순간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움직이고 변화하면서, 불편해하고 어려움을 깨쳐가는 고행에서 삶은 비로소 온몸으로 받아들여지는 법이다. 머무르지 않았던 모든 이의 삶이 예술로 남는 이유이다.


아버지와 나의 공통점은 이것이었다. 아버지는 판넬의 설계도면을 그저 그리고 만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설계를 살았'다. 나는 글쓰기 강의를 그저 만들고 해내는 것이 아니라, '강의를 살고 있었'다. 프로, 전문가란 무엇인가. 돈을 받고 그 일을 하는 사람만이 그 정의가 아니다. 그건 자본주의 논리에 국한된 정의일 뿐이다. '온몸으로 그것을 하는' 사람이, '그것에 사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프로이고 전문가이며 동시에 아티스트다.


나는 모든 노동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럴 수 없는 이 사회가 노동자를 '근로자'라고 특정해 부르고, 구조적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많은 초과 노동을 강요하고,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인 노예를 양산해낸다. 그런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머무르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한다. 관성에 저항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가끔씩 흐름에 맡기는 지혜와 별개로, 그저 안주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여기서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쉼과 머무름은 조금 다르다. 쉴 때는 오롯이 눈치 보지 말고, 걱정 없이 쉴 수 있어야 한다. 머무름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일정한 수준이나 범위에서 그친 상태, 즉 우리네 삶에서는 기계적 굴레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정체된 상태를 말한다.


혹 업데이트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어느 시점엔 문을 박차고 나가야 할 것이다. 머무르지 말고 때를 살피면서.

AI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력보다 값싸지는 순간부터 기계적인 인간은 기계 이하의 취급을 받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간은 기계처럼 일해도 감정이 있고, 인공지능은 기계처럼이 아니라 기계로써 무감정 노동이 가능한 인력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인간으로서 진화할 필요가 있다.  노동력, 생산력의 제1 유저는 (갑)고용주가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다. 다음이 내 생산물을 찾는 이들이어야 한다.


최소한의 생존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인간은 생산력을 가져야 하고 그 고유한 개별의 힘은 스스로 업데이트할 수 있는 힘이어야 한다. 머무르지 않는 연습, 그것은 정신을 달리해야 하는 관점의 변화이므로 당장 불안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차근차근 머무르지 않는 연습을 하자는 거다. 꾸준히 조금씩 나의 '주체적 생산력'을 가지는 연습 말이다. 새로운 자체 생산으로 그 능력의 사용이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인공지능과 경쟁하는 시대의 도래, 그럴수록 우린 더 인간으로서 뚜렷해져야만 한다.


더 이상 지금 대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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