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영 글쓰기 Feb 02. 2023

사람은 고쳐 쓰는 거라고 생각해

사람과 사람이어야 하는, 인간관계론

이동영 작가

말 그대로다. 사람이 (긍정적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중요한 건 ‘그는 사람인가’라는 정의에 부합하는지를 따져보는 전제다. ‘사람으로서 자격’ 상실이 마땅한 사람은 빨리 거르는 게 상책. (이런 생각을 들게 만든 부류가 누구나 살면서 한두 명 이상은 있었을 것이다.)

일단 사람의 자격이란 무엇일까. 감히 내가 그걸 인류 사회학적으로 정의하겠다는 건 아니다. 당연히 그럴 능력도 못 된다. 넌지시 화두를 던져보고, 이런 생각도 있다 정도로 이해하면 좋겠다.


사람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 그러니까 인간(人間) 사회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것을 지킬 줄 아는 개념이 탑재된 것. 그것이 ‘사람’이라 말할 자격이 아닐까. 노력하면 상대할 만한 급이 어느 정도 맞춰지는 사람, 사람이 말이 통하는 상대, 한마디로 인간 이하가 아닌 사람 말이다.


신이 아니라면 완벽한 사람은 없다. 지가 완벽하다고 떠든다면 그건 미쳤거나 사이비 중 하나일 것이다. 자신이 어떤 면에서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고, 그 인정 후에 자신을 인지하고, 그 인지 후에 타인을 인식하고, 그 인식 후에 가치관을 정립해 나가는 것. 사람이 하는 개념 정립이다.

소통에 있어 선한 의도를 내포한 게 아니라면 그때의 침묵은 뻔뻔함이다. 금이 아니라 악이다.


문제는 의도가 없는 사람이 행하는 침묵이다. 이때 침묵은 멍청함이다. 멍청하다는 건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으면서 박박 우겨대는 상태를 말한다.


사람은 모를 수 있다. 모르는 게 아는 것보다 많다. 그러나 불통하며 구체적으로 모른다는 걸 질문하려는 노력 없이 혼자 결론을 내어 버리는 사람이 있다. 이걸 ‘개념에 밥 말아먹었다’라고 흔히 표현한다.


그렇게 홀연히 떠나는 사람도 있다. 그냥 개념이 없었다고 인정하고 나면 해결될 간단할 일을 자기 자존심을 못 이겨 말없이 떠나버리는 사람도 더러 있다. 하루라도 빨리 필터링이 된 딱 거기까지 좋은 인연이다 하고 말면 되지만, 내가 기꺼이 베푼 것을 쏙 빼먹고 자기 자존심만 생각해 ‘먹튀’하고 떠나버리는 사람은 도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여전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근데 뭐, 철없던 과거엔 누군가에게 나도 그런 사람이었을 수 있으니까. 업보라고 생각하고 넘긴다. 차라리 ‘먹고 떨어진’ 것이 멀리 내다보면 다행인 경우가 많다.

자기 스스로 불현듯 ‘아 내가 개념이 없었구나’하고 메타인지적 부끄러움, 미안함 동시에 자신을 감당해 준 감사함을 느끼고 표현한다면 '사람'이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그 정도가 기본 소양을 갖춘 사람의 정도다.


그는 과오가 있더라도 고쳐 쓸 수 있다. 완전히 망가지지 않았다고 봐도 좋다. 기계와 인간이 다른 점 중 인간이 뛰어난 점은 ‘메타인지’가 아닌가. 전문가들이 말하길 여전히 인공지능은 이 메타인지 능력이 인간보다 떨어진다. 인간이 AI 시대에 AI와 경쟁도 하고 도움도 받고 지배도 하며 살아가려면 이 메타인지는 필수다. 사람과 살아갈 때는 몰랐으나 기계와 살아갈 땐 극명해지는 사람다움, 인간다움이 메타인지이기 때문이다.


수시로 하는 자기 비평, 자기 객관화, 빠른 자기 인정, 성장하려는 의지와 태도, 위기 상황대처와 정확한 문제파악 및 해결능력, 피드백을 원했을 시에 돌아온 피드백을 기꺼이 수용하는 자세, 결핍과 과잉의 정도를 가늠하는 자기 기준 등이 명확한 사람일수록 성숙하다. 외부동기가 아닌 내적동기로부터 발현한 변화만이 진국이다.


사람이 바뀌는 데는 조건이 붙는다는 소리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서 죽었다 깨나도 누가 고쳐주지 못한다. 대신 고쳐줄 수 없다. 스스로 고쳐야 한다. 스스로 고쳐져야 한다. 그래서 사람이다. 기계와 다르게 인간적인 내적동기가 ‘고쳐 쓰도록’ 해주는 결정적 기제가 아닐까 한다. 타인의 자극과 동기부여가 아무리 강렬하더라도 그건 자신의 내적인 작용 없이는 메아리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나를 정확히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타인에게 무리한 요구나 오해의 여지를 흘리지 않는다. 어쩌다 실수는 하겠지만, 이것이 반복되거나 나를 공격한다고 생각하며 변명하고 합리화를 한다면 그것은 보편적으로 적당한 사이를 두는 사람- 곧 ‘인간’이라고 하기엔 어렵다. 적어도 내가 상대하는 ‘사람’의 정의는 그러하다.

가끔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은 사람이 보인다. 반면 누가 봐도 멋있게 나이 든 어른도 보인다. 그 누가 전자가 되고 싶을까.


고쳐 쓸 사람은 ‘미안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알면’ 희망이 보이는 싹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다움이고, 사람은 기계처럼 누가 고쳐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거듭나는 존재라는 점이다.


그건 성숙한 한 사람이 무릅쓴 용기의 산물이고, 그 결과는 오롯이 자기 삶의 변화일 것이므로.


 https://linktr.ee/leedongyoung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유니크(Unique)한 인생경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