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서로 잘 맞는 사이'란 말을 따져보게 되었다. 넓고 얕은 인맥보다 깊은 소수의 관계를 추구하는 나는 가까이 오래 두는 이들의 공통점을 살펴봤다.
나도 처음엔 그들이 나와 가까운 만큼 내게 하는 직설에 상처도 받고 혼자서 원망도 했었다. 그러다정확하게 내 상황을 말해주고 더 나은 방향을 깨닫게 하는 이들이 소중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요즘은 온라인에서까지도 쉽게 '친한 사이'를 규정하지만, 나에게 친한 사이란 내 상황을 직시하게 만들어도 내 마음이 괜찮은 사람이다.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소리야'라는 부연설명이 필요 없는 사이. 내가 먼저 그렇게 느끼는 상대가 나에겐 '친한 사람'의 정의다.
어떻게 다른 주체를 가진 인간이 서로 잘 맞을 수가 있을까. 이건 평생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신, 잘 맞지 않는 지점에 오히려 관계를 좋게 만드는 열쇠가 있다고 생각했다.
잘 맞지 않는 지점에 대하여 크게 문제 삼지 않을 정도로 무디거나, 무게를 두지 않는(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상대이기에 잘 맞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 혹 갈등을 빚더라도 관계를 끊을 정도는 아닌 서로에게만은 뒤끝 없는 성격 덕에 위기가 있을 때마다 어찌어찌 건너와서 잘 맞아 보이는 관계도 의외로 많다.
살아온 경험, 거쳐온 환경, 학습된 이성적 판단에 따른 금기선의 기준이 개인마다 있다. 맞지 않는 부분이 '별 게 아닌' 사람끼리 조금만 신경을 쓰면 '잘 맞는 관계'로 유지가 된다. 핵심은 시작이 아니라 유지다.
어쩌면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져서 호감 있는 관계가 맺어졌고, 그 사이가 운 좋게 유지되는 것일 뿐. 맞지 않는 부분을 별 게 아닌 거로 느끼는 사람이라도 타이밍이 자꾸 어긋나면 좋았던 시작이 원망스러울 만큼 유지가 어려운 관계가 있지 않나.
또한 서로 도움이 되는 걸 비의식적으로 느끼면관계는 유지된다.
이 상대를 만나면 많이 웃는다거나 실컷 울 수 있다거나 마음껏 떠든다거나 욕을 해도 거리낌 없다거나 어렸을 적 내 상처와 결핍을 온전히 이해하는 기분을 들게 한다거나 이미지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되고 체면치레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갑자기 불러내더라도 찝찝하지 않고,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밑바닥의 외로움을 해소해 준다거나 하는 등 모두 '도움이 된다'고 느끼도록 하는 것에 속한다.
암만 세상의 순리가 자본주의라 해도 물질적인 것만이 도움이 아니라 정신적인 결핍과 과잉을 채워주고받아주면 그것만 한 도움이 또 없다. 비즈니스 관계에서도 가능은 하지만 확률 상은 매우 희박하다. 그래서 더 소중하다.
이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과정에서 서로가 희생과 배려, 감사의 마음까지 진실로 갖추고 있다면 '좋은 관계'로 오래 지속된다.
당신 주변을 둘러보라.
특별히 천생연분이란 건 없다. 웬만하면 착각이고 환상이다. 일정한 시기에 천생연분이란 말을 느낌적으로 떠올리게는 하지만, 실체는 얼마 못 가 현실을 자각하게 한다. 그딴 건 처음부터 없었다고.
서로의 사랑이나 우정 따위의 마음이 변한 게 아니다. 믿고 싶었던 것만 보던 당신이 현실로 귀환한 거다. 부정하는 마음이 덜하고, 각자 주체적 선택에 속마음이 동하면 그것이 사랑 혹은 우정으로 맺어진다.
인간에겐 누구나 마찬가지로 어느 시점이 찾아온다. 노력을 하거나 손절을 택해야만 하는 그 '때'가 말이다. 기꺼운 사이로 다시 이 위기의 지점을 통과해야 한다. 건너가야 한다. 그렇게 필터링된 관계만 내 곁에 남아 내 남은 생의 '인복'을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