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 들어가기가 끔찍이도 싫어 복도에서 한참을 쭈뼛거리다가 난 그날도 역시 지각을 했다. 부모님의 호령 때문에 반드시 ‘개근상’만은 타야 했던 나. 한숨 한 번 ‘휴’ 내뱉고서 무겁게 교실 뒷문을 열었다. 드르륵
운동장이 보여야 할 창문마다 새까만 커튼이 쳐져 있었다. 창밖 햇살이 안으로 거의 새어 들어오지 않은 음침한 교실 안 풍경이- 내 시야의 한 프레임 안에 다 들어왔다. 뭐지?
흐흐흑… 엉엉…어엉…엉
온통 울음바다였다. 영문도 모른 채 두리번거리던 나는 처음 겪는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파악하려고 애썼지만 애석하게도 무리였다. 어렸고 어려웠고 어지러웠다. 거울처럼 똑같이 울고 있는 아이들을 지나 맨 앞자리까지 나는 까끌까끌한 책가방 끈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자리에 앉기 직전이었다. 내 옆자리에 하얀 꽃 한 송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내 자리 바로 앞에 서서 내 책상에 당신의 안경을 놓고, 두 손바닥으로 그 가녀린 몸을 지탱했다. 가까이서 보니 긴 머리에 얼굴이 안 보이도록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왜 우세요?
동영아, 네 짝꿍 지은이(가명)가 하늘나라로 어제, 떠났단다. 선생님이 훌쩍이며 답했던 이 장면은 30년이 된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다시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모두가 흐느끼고 있었다. 짝꿍이 있던 바로 옆, 빈 책상과 의자를 바라보았다. 멍해져서 막 눈물이 쏟아지거나 슬프진 않았지만, 선생님과 아이들이 우니까 나도 왈칵 뜨거운 눈물방울이 맺혔다. 죽음이란 게 영 실감은 나지 않았다. 가까이 있던 이의 죽음을 경험하고 인지한 건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점차 눈물로 번지는 내 앞에, 짝꿍이 자주 입었던 분홍색 드레스가 아른거렸다. 매일 몇 마디씩 나눴을 짝이었을 테니 물리적으로만 가까웠던 건 아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가장 많이 이야기를 나눈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들어 보니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덤프트럭이 그만 작디작은 짝꿍을 못 보고 사고를 냈다고 했다. 적나라한 상황 묘사가 어린 내겐 적잖은 충격이었다. 이후로 몇 년 동안은 길을 걷다가 큰 트럭만 보면 분홍 드레스가 걸려 있을 것만 같은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고학년이 될 때까지도 그랬다. 조금씩 시간이 지나 겨우 정리된 내 감정은 하나였다.
상실감.
내 곁에 가까이 있던 사람이 아무 말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떠날 수 있다는 현실. 누구든지 내 곁에 영원히 머무르는 일 따윈 없다는 개념이 진리처럼 규정된 순간이었다. 너무 일찍 이별을 배운 탓일까. 불현듯 떠나간 존재가 내게 남긴, 누구도 탓할 수 없는 허탈한 상실감에 나는 툭하면 멍해졌다.
내 쪽이 더 많은 차지를 한, 연필로 몇 겹의 줄이 그어진, 하나의 책상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 선은 이젠 의미가 사라지고 없었다. 난 짝꿍 없는 1학년을 보내야 했고, 그 누구와도 친해지기 어려운 초중고 학창 시절을 보냈다.
‘어차피 너도 말없이 떠날 거잖아.’
관계에 불신이 가득했다. 소중함이나 절실함 대신 허무함이나 배신감이 내 마음을 더 지배했다. 짝꿍의 사고 이후 새로운 관계를 맺는 건 나도 모르는 사이 늘 조심스러운 일이 되어 있었다. 그 일은 내 인생에 ‘사건’이었다.
대학생 시절, 미술치료 수업을 받은 적이 있다. ‘가장 인상에 남은 나의 첫 기억’을 주제로 내가 처음 그려 낸 건 ‘상실’이란 제목의 그림이었다. 까만 커튼이 쳐진 교실, 맨 앞자리엔 국화꽃 한 송이 놓여 있고, 반 아이들은 모두 울고 있으며 훌쩍이는 담임선생님과 멀뚱히 앞자리로 걸어가는 나. 각인된 그 교실 풍경을 그려 낸 것이다.
(이하 생략)
그림: 이슬아 / 글: 이동영 #사람아너의꽃말은외로움이다 에세이 본문 중 '상실'편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