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란하고 찌질하고 속상하며 이상한 이들이 괴롭히는 잔혹동화라면 또 모를까
인생은 마냥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답니다.' 하고 끝나는 아름다운 동화가 아니라는 걸 마흔을 앞두고서 깨닫는다. 내가 믿을 만한 몇몇의 소중했던 사람들은 그때그때 상황에 치여서 다시 가까워지는 시도가 어색할 만큼 멀어졌다. 그 자리가 비워져 혼자 단단해지는 시간이 필요한데 도리어 자꾸만 정신이 아픈 이상한 이들이 소중한 내 시간과 자리에 스쳐간다. 내가 참 만만하게 얼굴을 내밀고 직업을 밝힌 채 너무나 많은 말을 쏟아낸 탓이다.
지나치게 예민했던 나를 점점 무뎌지게 만들고 싶어서 스스로 갈아넣기로 했다. 날카로워지려고 가는 게 아니라 무뎌지기 위해서 틈 없이 나를 쓸모 있게 하는 갈아넣음이다. 신경을 다른 곳으로 온통 쏠리게 한다. 굳이 에너지를 내어 상대할 상황과 존재들이 아니면 철저히 외면하는 거다.
그러다 내 직업에 대해 돌아보게 됐다. 난 언제까지 작가이고 글쓰기 강사로 살아갈까.
단순히 돈을 벌고 명예를 얻는 직업 이상으로. 직업인으로서 10년이 훌쩍 넘었으니 깊이 고민해 볼 시점이 되었다.
이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초반에는 그랬던 것 같은데 갈수록 수준이 낮고 저렴한 인연도 간혹 꼬이는 게 어쩌면 피봇(방향전환)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소수의 몇 사람이긴 해도 일상의 평화를 해치는 것은 도저히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날 이끈다고 여겨지기에, 작금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우선은 내 세계를 확장할 필요가 있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강의를 하는 것이나 글을 쓰는 것 모두 딱 정체하고 안주하기 좋은 능숙한 정도가 되다 보니 나름의 변화가 절실해졌다. 아니 남을 고쳐 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도 내가 나 자신을 고쳐 쓰는 건 가능에 더 가까운 일이 아니겠나.
내 세계를 확장하는 첫 번째는 구사하는 언어의 확장이다. 두 번째는 반복 노출 되는 콘텐츠 알고리즘의 확장(시야 확보)이다. 세 번째는 오프라인 관계의 확장이다. 네 번째는 도전의 확장이다.(안 해본 것 하기) 마지막으로 건강(+체력) 관리의 확장이다.
최근 한 달 사이 5kg 정도를 감량하고 내 몸에 있던 각종 병적 증상이 완화되었다. 비염, 디스크, 게으름, 조급함, 시력, 어지럼증, 족저근막염까지 증상이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 이젠 지적인 취약함도 평소 한계로 치부했던 언어 구사력도 어려운 글을 읽고, 모르던 분야를 학습하고 새로운 외국어 공부에 도전함으로써 해결하고 있다. 합격할 시험이 있든 없든 평생 공부를 하기로 했다. 성격의 유연함도 나 중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고 먼저 센스 있게 움직이려 노력한다. 안 하던 것들을 하나씩 도전하고 성취하기 시작했다.
예민하게 상처받는 대신 차분하게 시선을 돌리면서 내 한계와 자의식에 갇히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지금까지 해왔다고 해서 전부가 되지 않도록. 일례로 난 지금껏 자격증 따는 일에 나답지 않다고 여겨왔었는데 그딴 철학도 아닌 편견은 다 때려치우고 필요하면 공부해서 취득하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로 했다. 별 것 아닌 거 같지만 내 인생이 달라지는 기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 5~6년 후 이동영의 모습은 작가, 강사라는 직업으로 한정지어지지 않을 것이다. 실체도 냉소적인 이미지 뒤에 다정함이 아닌 진짜 내 사람만은 있는 그대로 보고 배려하는 겉따속따 이미지와 다정함이 함께 있는 인간 이동영으로 살아갈 것이다.
인생을 아름다운 동화로 만드는 건 오로지 내 마음먹기와 생각하기에 달려있다고. 5~6년 후(40대 중반) 크게 될 놈 이동영은 지금부터 차근차근 과거의 구린 이동영을 죽여 나갈 것이다. 현재를 살고 미래에 잘 살고 있는 이동영을 만나기 위해 달릴 것이다. 나는 나로서 빛난다. 저마다 빛나는 방식은 다르다. 나는 5~6년의 어둠 속에서 묵묵히 빛을 모으고 있을 것이다. 자체발광하는 눈부신 그날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