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봉
‘자기애’는 오래 전부터 문화계에 존재하며 가장 익숙한 소재로 남아왔다. 유명 대중가요의 가사에서부터 소설, 드라마나 영화 속 대사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이 자신을 부정하다 결말부에 결국 자신을 사랑하게 됐다는 이야기는 어느 매체를 틀어도 나올 정도다.
이런 자기에 대한 인간의 탐구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먼 고대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무덤 벽화에 사람을 그릴 때 옆얼굴-정면을 바라보는 눈-나란한 팔과 어깨-윤곽이 다 보이는 손과 발의 형태로 그리곤 했는데, 이를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많은 고대 철학자들도 자신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성찰에 대한 말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문장 또한 인간 자아에 대한 고찰에서 넘어온 말이다.
이런 고대의 흐름에 덧대어, 그간의 ‘자기애’ 풍토 또한 이런 성찰에서 기인한 것이 다수였다. 나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해, 사회에서 주입한 자신의 불순물들을 건져내고 그 사이에서 ‘진짜 나’를 발견하는 내용은, 성찰을 통한 자기애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서사 중 하나다. 그러나 이런 성찰의 서사는, 현대 시대의 기술이 점차 고도화됨에 따라 흐려지고 그 범위를 키워가고 있다.
오랫동안 자기애는 ‘나를 아는 것’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답게 살기’를 가르치는 자기계발서가 마치 인생의 지침서처럼 여겨지고, 수많은 이야기 속 주인공은 삶이라는 거친 파도를 넘어 본질적인 ‘나’를 향해 나아갔다. 겨울왕국2에서 주인공 엘사가 자신의 기원을 찾아 온힘을 다해 바다를 건너는 장면, 트루먼 쇼의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가 거짓된 세상을 떠나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폭풍우를 건너 세트장의 끝에 다다르는 장면 등은 이런 성찰의 면면을 보여준다. 이때의 자아는 마치 깊은 곳에 숨겨진 보물을 찾는 것처럼, 사회라는 외부의 건더기를 덜어내고 오랜 탐색을 거쳐 마침내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결과 ‘자기애’라는 하나의 결과에 도달한다.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보편적인 자기애가 가진 모습이었다.
“오늘 나 나 예쁜 거 맞지 (맞지) 끝내 주는 거 맞지 (끝내주지) / 이제 나 난 내 Feel에 미쳐 (미쳐) 딱 그냥 오늘처럼 살라구 다신 주저앉지 않을라구 (우 우) 있잖아 나 이제서야 날 만난 거 같애” (‘언니들의 슬램덩크 시즌2’ 결성 그룹 언니쓰의 ‘맞지?’ 中)
2010년 중후반을 지나며 이런 성찰에 대한 자기애는 사회에 대한 반감으로도 표현됐다. ‘사회라는 외부의 건더기를 덜어내는 것’에 자기애의 과정이 집중되며, 당시 1020세대가 느끼는 사회의 부당함과 저항 의식이 드러났다. 이 시기에 주목받은 대표적인 대중가요는 아이돌 그룹 있지(ITZY)의 음악들이 있는데, 이밖의 음악들에도 ‘나’는 주체적인 자아로, 동시에 사회는 주체적임을 방해하는 것으로 설정하는 표현들이 다수 존재한다.
“외모만 보고 내가 날라리 같대요 So what? 신경 안 써 I'm sorry / 언니들이 말해 철들려면 멀었대 I'm sorry sorry 철들 생각 없어요 / 네 기준에 날 맞추려 하지 마 난 지금 내가 좋아 나는 나야” (있지, 달라달라 中)
“잔소리는 Stop it 알아서 할게 내가 뭐가 되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좀 / I'm so bad bad 차라리 이기적일래 눈치 보느라 착한 척 상처받는 것보다 백번 나아 / 누가 뭐라 해도 난 나야 난 그냥 내가 되고 싶어 I wanna be me, me, me 굳이 뭔가 될 필요는 없어 난 그냥 나일 때 완벽하니까 I wanna be me, me, me” (있지, WANNABE 中)
“거침없이 직진 굳이 보진 않지 눈치 / 착각하지 마 쉽게 웃어주는 건 날 위한 거야 / 널 당기는 것도 멀리 밀치는 것도 제멋대로 하는 bad girl 좋건 싫어하건 누가 뭐라 하던 When the bass drop it's another banger” (블랙핑크, 뚜두뚜두 中)
“이상해 좀 특이해 평범한 게 더 싫어 이런 내 모습 부모님께 감사해 / 편한 게 좋아 그게 나니까 돌려 말 안 해 숨기지 못해 / 건방져 신경 안 써 나를 모르는 소리 그냥 내 멋대로 내 식대로 해” (마마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中)
이 시대의 자기애는 분명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것’. 여기서 ‘있는 그대로’의 뜻은,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성공 등 자신 외부에 존재하는 것을 모두 벗어난 순수한 자아 그 자체를 의미했다. 이는 일종의 정화(淨化) 의식과 같이, 직업이나 재산을 비롯해 타인의 평가와 사회적으로 금기되는 것과 상관없이 그저 나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라는 깨달음이 곧 자기애의 완성처럼 여겨졌다.
더해 이 시기의 영화나 드라마들은 ‘가짜의 세상’인 SNS를 벗어나 현실의 자아를 찾길 권고했다. 성찰적 자기애의 관점에서, 온라인 세상이란 하나의 가면에 불과했다. SNS는 자신을 찾고 결국 사랑하도록 하는 서사에서 불필요하거나 방해되는 요소로 사용되며 부정적인 것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현시대는 더 이상 ‘진정한 나’라는 개념이 유일한 정답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가 발달하며 우리는 하나의 정체성에 갇히는 대신, 수많은 ‘나’를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연령대와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SNS를 사용하며 온라인 세계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든 것도 과거와 다른 점이다.
사람들은 SNS에서 여행을 자주 가고 성과가 좋은 ‘나’를, 게임 속에서는 용감한 리더인 ‘나’를 만들어냈다. 심지어는 한 게임, 한 SNS에서도 여러 계정을 만들어 아주 많은 모습의 ‘나’를 만들 수 있었다. 단순히 주어진 환경에 따라 모습이 변화하는 것을 넘어, 내가 주체적으로 나를 선택하고 창조하는 행위로 이어졌다.
이런 변화는 ‘나’라는 개념의 경계를 허물었다. 자아 성찰의 시대는 자기애라는 하나의 목적지를 향한 순례였다. 반면 자아 해체의 시대는 정해진 목적지가 없음을 유유히 받아들이는 자유로운 방랑에 가깝다. SNS 시대의 다자아가 익숙해지며, 우리는 더 이상 환경에 따른 ‘나’의 변화에 ‘나를 잃었다’고 반응하지 않게 됐다. 사람들은 ‘진짜 나’와 ‘가짜 나’를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이 모든 것에서 보이고 숨겨지는 나의 모든 모습을 포용하는 것으로 자기애를 완성한다. 어쩌면 나의 한 부분을 사랑하는 것에서, ‘전체를 사랑하는 것’으로의 포괄적이고 섬세한 전환인 셈이다.
최근 주목받는 영화들에서도 이런 면면을 살필 수 있다. 최근의 영화들은 SNS 시대 속 해체되는 자아에 관한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고 있다. 올해 국내에서 흥행한 <서브스턴스(2024)>는 이러한 자아 해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자신의 나약한 부분인 나이 들고 초라해진 모습을 제거하고, 완벽하고 젊은 또 다른 자신을 만든다. 새롭게 만들어진 것 또한 ‘나’이지만, 완벽한 자아만을 남기려는 철저한 자기혐오에 가깝다. 주인공은 자신을 분해해 오직 아름답고 완벽한 부분만을 사랑하려 하나, 결국 이 분리된 자아들이 서로를 파괴하며 영화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영화는 우리가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자아만을 추구할 때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경고한다. 우리의 일부를 외면하는 자기애는 결국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비극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미키17(2025)>은 복제 인간이라는 소재로 '나'라는 존재의 유일성이 해체될 때 발생하는 고독을 다룬다. 주인공 미키는 끊임없이 죽고 다시 복제되는 과정에서 착오로 미키가 둘인 ‘멀티플’ 상태가 된다. 전혀 다른 성격의 두 미키는 금기인 멀티플이 들켜 둘 다 죽기 전에 서로를 죽이려 싸우다가, 각자 서로 다른 시간에 활동하는 것으로 합의한다. 결말로 갈수록 두 ‘나’ 사이의 팀워크가 드러나고, 둘인 ‘나’의 서로를 향한 애정이 중요한 열쇠가 된다. 기술이 자아를 해체하는 시대의 자기애란 내가 어떤 모습이든,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 존재의 가치를 지켜내려는 것에서 기인함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최근 주목받은 이 영화들은 자아가 여러 모습으로 해체되는 SNS 시대를 보여주고 있다. ‘진정한 나’를 찾기보다는, ‘모든 나에 대한 포용’의 메시지를 던지며 말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세 영화에 더해 <용과 주근깨 공주(2021)>까지 보는 것을 추천한다.)
현대의 ‘자기애’는 SNS 시대와 만나 새로운 형국에 돌입하게 됐다. ‘숨겨진 나를 찾는 모험’보다는, 삶이라는 모험 속에서 마주한 모든 나의 모습을 인정하려는 풍토로의 변화다. 허나 이 시대의 변화에도 여전히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정말 관심이 많다는 하나의 사실 말이다.
이상향을 쫓았던 고대 이집트, 철학자의 시대였던 고대 그리스를 지나 인간을 마주하려 한 르네상스 시대, 진정한 나에 대해 갈증을 느낀 현대 시대와 나의 모든 면면을 사랑하려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마다 ‘나’를 향한 태도는 다르게 나타남에도 그 속에 자신을 이해하고 가치 있게 여기려는 보편적인 감정이 깊게 새어 나온다. 나를 사랑하는 행위는 모든 인류의 과제였던 셈이다.
수천 년의 시간을 흘러온 ‘나’를 향한 사랑은, 이제 파편화된 자아의 시대에 마주했다. 마주한 나의 많은 모습들에 당혹감을 느끼더라도, 그 모든 모습을 ‘이 또한 나’라고 말하는 용기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이 아닐까.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모든 ‘나’를 위해, 우리의 관심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것에 있다.
*동국교지 86집 '이름은 비워둘 수 없습니다' 실물 책자의 목차 파트에서 본 글의 제목이 잘못 기재되어 있습니다. 교정에 있어 미숙했던 점 사과드리며, 해당 부분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