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감도’ 해부하기

지운

by 동국교지

최근 미디어에서 쏟아지고 있는 단어, ‘느좋’. ‘느낌 좋다’를 줄인 이 단어는 개인의 취향적 이상향을 나타내기 위해 주로 쓰인다. 하지만 개인의 취향은 모두 다르며 ‘느낌이 좋은‘ 것을 구분하는 기준 또한 개인마다 천차만별인 게 당연하다. 그렇기에 느좋이 정확히 무엇이냐 묻는다면 대부분 얼버무릴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러니하게 ‘느좋녀’, ‘느좋남’을 생각했을 때 공통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매우 비슷한 톤앤매너(Tone and Manner)1), 무채색에 가깝거나 낮은 채도의 톤온톤 컬러2). 눈빛은 묘하게 초점이 없으며 간결하고 극한의 절제미가 느껴지는 착장을 하고 있는 사람. 아무것도 뽐내고 있지 않은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랄만한 가격의 착장을 하고 있으며, 예술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사람들 말이다.

웃기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느낌 좋다’고 불리는 취향을 갖고 싶어 핀터레스트를 뒤지고 인스타그램의 유행을 좇았다. 그러다 문득 손에 쥐고자 했던 게 진정 내것이 아닌 것 같고, 좋아하는 것조차 다수의 선호에 끼워 맞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누구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느좋’이 뭔지 더욱 알고 싶었다. 그 속엔 무엇이 들어있는지 말이다.


1) 브랜드나 개인이 전달하는 메시지의 어조(Tone)와 전달 방식(Manner)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

2) ‘톤을 겹친다’라는 의미로, 동일 색상 내에서 톤의 차이를 두어 배색하는 방법


감도 높은 게 뭔데?

‘느좋’과 같이 형용하기 어려운 감각을 포괄하는 또 다른 단어를 최근 수많은 기업과 브랜드에서 내세우고 있는데, 바로 ‘고감도’이다. ‘감도 높은 아이템’ ‘감도 높은 브랜드’ ‘고감도 여성 고객’ 등의 단어가 최근 잡지, 칼럼, 광고 문구 등에 쉼 없이 등장한다. 예시로 패션 플랫폼 29cm는 ‘감도 깊은 취향 셀렉트샵’이라는 문구를 전면에 내세워 대체로 가격대가 꽤 있는 디자이너 브랜드 아이템들에 대한 개인 맞춤형 추천 서비스를 선보인다. 신선식품과 식재료 중심 플랫폼 마켓컬리의 경우에도 ‘Better life for all’이라는 BI(Brand Identity)를 내세우며 이미 취향을 가지고, 가격대가 있더라도 높은 품질을 선호하는 고객들을 표적으로 한 마케팅을 선보이고 있다.

이렇듯 최근 사람들은 비싸더라도 고품질의, 또는 적은 수량의 아이템을 선호한다. 이에 소수의 취향을 저격하는 니치마케팅 또한 만연해졌다. 이들은 주로 ‘고감도’를 내세운 아이템 또는 마케팅으로 소비자들의 흥미를 끈다. 이렇게 불리는 것들은 대체로 차별화된 감각을 보여 주려는 경우가 잦으며 특히나 평균보다 높은 가격에 형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희소성이 있는 빈티지 의류나 디자이너 브랜드, 해외 디자인 감성이 깃든 가구나 인테리어 소품 등이 있겠다. 결국 이러한 시류를 반영해 탄생한 단어가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질문. 왜 굳이 감도 ‘높다’라고 칭하는 것일까. ‘높다’라는 것은 결국 ‘낮은’ 것이 존재함을 전제하며, 무의식적으로 ‘낮고‘, ’높은‘ 취향을 가진 사람을 구분 지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앞서 말한 ‘느좋’도 마찬가지 ‘느낌 좋은’ 취향을 가지지 않았다면 ‘좋지 않은’ 것인가? 그러나 적어도 MZ라 불리는 세대들은 꽤 이러한 ‘고감도 마케팅’에 열광하고 있으며 이로 비롯된 구별적 언어 사용은 우리도 모르는 새 일상에 스며들고 있다.


21세기의 계급

우리의 ‘취향’은 이런 ‘보이지 않는 계급’의 구분을 가시화하는 데 기여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구별 짓기』라는 저서를 통해, 사람들이 문화적 취향을 통해 계급을 나누고 구별 짓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사회는 계층마다 ‘문화 자본’이 다르며, 그 자본에 따라 음식, 운동, 취미, 예술 등의 취향이 나뉜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상류층, 고위 관리직, 노동자 계층을 대상으로 음식, 운동, 문화콘텐츠, 취미를 조사했다.

먼저 음식 취향의 경우, 상류층은 기호식품이나 영양소 좋은 식품 등을 지출했지만, 노동자들은 이에 비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식료품을 구매한 것으로 나타났다. 운동에서도 상류 계급은 골프, 승마, 테니스와 같이 접근성이 떨어지고 비용이 많이 드는 스포츠를 선호했으며, 서민층은 고통을 이겨내고 승리를 달성하는 축구와 복싱 등을 즐겨 했다. 여기서 부르디외는 서민에게 자본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고, 몸으로 경쟁하는 게 가장 평등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문화 콘텐츠의 경우, 노동자들은 단순한 재미와 쾌락을 추구하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반면 상류 계층은 아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구별될 수 있는 콘텐츠, 그야말로 ‘예술’을 소비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콘텐츠를 소비했다.

여기서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취향’은 개인의 고유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살아온 환경을 깊이 반영한다는 것을. 결국 앞서 말한 ‘고감도’의 취향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은 단지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그 감각을 기를 수 있는 자원과 기회, 여유가 있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부르디외는 ‘교과서적 교양’과 ‘일반교양’을 구분한다. 교과서적 교양은 학교라는 제도 안에서 획득된 피상적인 문화 자본이며, 일반교양은 어릴 적부터 가정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습득된 것에 가깝다. 학교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지식을 전달하는 듯하지만, 그 지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체화되는 정도는 개인의 출신 계급에 따라 다르다. 결국 일반교양을 가진 사람이 교과서적 교양만 아는 사람을 ‘이것밖에 모른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위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소득, 인맥, 학벌 등에 따라 서로 다른 취향을 공유하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구별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진다. 단순히 남과 다른 것에 만족한다면 다행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잘살고 있다는 지표가 곧 계급이고 힘이다. 결국 우리의 취향 또한 경제적 요인과 같은 환경을 반영하기에, 이를 표상하는 ‘구분 짓기’의 매개체로서 작용하게 된다. 이렇듯 권력을 갖기 위해 사람들은 사회가 직조한 부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고 그 기준을 다시 재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으로 인해 만들어진 엉터리 계급도는 점차 당위성을 갖고 우리 개인의 취향까지 침범하고 있으며 ‘고감도’, ‘느좋’이라는 허울 좋은 말들 아래에는 사실상 취향을 계급처럼 나누는 사회의 시선이 숨어 있었다. 마치 어떤 취향은 세련되고 어떤 취향은 촌스럽다는 듯, 우리 자신도 그 구분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그 속은 無였음을

세상은 표면적인 아름다움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 훨씬 많다.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사회는 마치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처럼 취향의 높고 낮음을, 좋고 좋지 않음을, 예쁘고 못생김을 나눈다. 이렇게 ‘고감도’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 일상에 스며들어 당신의 온전한 감각을 닳게 하고 있었으며 서로를 ‘구분 짓게’ 만들고 있었다.


취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모든 것, 즉 인간과 사물 그리고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할 수 있는 모든 것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을 구분하며,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분된다.

또한 부르디외는 문화적 취향을 설명하며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이용하는데, 이는 쉽게 말해 개인의 문화적 취향과 소비의 근간이 되는 ‘성향’을 의미한다. 아비투스는 후천적으로 길러진 성향이기에 개인의 문화적 취향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후천적 아비투스가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부르디외는 계급이 높은 사람들의 문화를 고급문화로, 그렇지 못한 문화를 무조건 저급 문화로 분류하는 이분법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저 그들이 속한 사회의 문화를 습득한 것이지, 취향이 그 사람의 인격적 수준 또는 지적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트렌드의 중심에 놓여있던 ‘고감도’는 서로를 구분 짓게 만들고, 세상을 단조롭게 만든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고감도의 취향을 향유하는 것이 당신의 지혜를,인격을, 계급을 높여 주진 않는다. 따라서 나처럼 출처 불명의 불편함을 느꼈다면, 벗어나고 싶었다면, 한 번쯤 되돌아보길 바란다. 당신의 온전한 취향마저 타인의 시선에 얽매였던 게 아닌지. 결국 또다시 사회가 직조한 기준에 맞추어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아닌 것을 ‘취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진 않은지 말이다.


당신의 취향은 정말 당신의 것이 맞는가?




참고문헌

나영웅, 2024, 『취향은 어떻게 계급이 되는가』, 지음미디어.

피에르 부르디외, 2005, 『구별짓기』, 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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