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서
하늘을 찌를 듯하던 아파트가 흙먼지 날리는 콘크리트 더미로 전락한 모습이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동네 골목을 지키던 가게들이 문을 닫자, 각 아파트 단지의 이름을 내건 재건축 추진위원회, 재건축협의회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재건축 사업을 위한 안전진단 통과를 기원하는 현수막부터 통과를 축하하는 현수막, 각종 아파트 브랜드에서 자신들과 계약해달라며 보내는 현수막이 즐비한 동네는 마치 축제 분위기 같다. 요란한 기원과 축하는 작은 소리를 덮어 버리고, 시선이 구석진 곳으로 가는 것을 막기 쉽다. 이들이 쳐다보지 않으려 하는 곳에는 무엇이 있고, 이들이 못 들은 척하는 목소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요즘은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공사 뷰’가 눈에 걸린다. 전국적으로 큰 규모의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수많은 아파트와 건물을 철거하고 으리으리한 새 건물을 지어 올리는 장면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살아 있는 동안 꾸준히 이동하며 언젠가는 사라진다. 거주할 곳이 계속해서 생겨나야만 하고, 이에 따라 동네 역시 만들어지고 또 사라진다. 그러나 동네가 사라지는 시기와 만들어지는 시기가 부드럽게 연결되지 않는 것만 같다. 현재의 재개발 양상은 어느 동네의 자연스러운 소멸 후 그곳에 새로운 동네를 건설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밟지 않는다. ‘돈이 될 것 같은’ 동네에 시선을 뻗고, 경제적 조건을 우선하여 확인한 후 목표 지역을 정한다. 사라지는 시기에서부터 사람의 손길을 타는 부자연스러운 루틴이 만들어졌다. 시간의 흐름에 맡겨야 할 일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려 하니 부작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재개발이 진행되는 지역에 전세나 월세로 거주하는 세입자들은 주택 철거로 인해 이주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정부와 재개발 사업 시행사에서는 이들에게 일정한 보상과 지원을 제공한다. 이주비 지원, 이사비 지원 및 임시 주거지 제공 등이 이루어지며 이는 시행사의 정책과 지역,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러나 지원금 한도나 보상 기준이 정해져 있으므로 모든 세입자의 상황에 부합하는 지원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주비나 이사비 지원 역시 세입자들이 이주할 때 발생하는 모든 비용을 보장해 주지 못하고 있다. 세입자들에게 큰 짐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들이 더 나은 곳으로 갈 수 있었다면, 그럴 돈이 수중에 있거나 쉽게 구할 수 있었다면 미리 더 좋은 보금자리로 향했을 것이다. 이동할 수 없는 상태였던 이들은 갑작스럽게 쫓겨나 어쩔 수 없이 기존보다 낙후된 환경에서 주거해야만 한다. 금전적 지원 외에도 삶의 터전을 떠나게 되면서 적절한 거주지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국가는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 정책, 재개발 사업 등의 문제로 거주 및 생존이 힘든 것은 결코 국민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을 집에서 내보내면서 어느 정도 구색을 맞추기 위한 정도의 금액만 손에 쥐여줄 것이 아니라 국가의 더 큰 책임감과 해결이 필요하다.
철거가 이루어지는 방식 역시 폭력적이다. 재개발 공사 현장이 점점 늘어나면서 자연물이 무분별하게 훼손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대표적으로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동네를 지켜봐 온 가로수들이 그 동네의 마지막과 함께 사라지고는 한다. 재개발 구역의 가로수는 공사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베어지고 대부분 폐기된다. 재사용을 위해 이식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해 결국 폐기되는 일이 잦고, 임시 보관 부지를 거치는 과정에서 가로수가 죽어 버릴 가능성이 높다. 이를 통해 돈을 벌기 위한 과정에 방해된다면 그 대상이 한 생명체로서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정하게 배제하며 파괴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재개발은 왜 2020년대 들어서 특히 심화하였을까? 과거에 비해 최근의 재개발은 대규모 단지 중심이며,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이는 한국의 초창기 아파트들이 202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재건축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1세대 아파트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쯤 건축되었고,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지은 아파트를 2세대 아파트라고 본다. 3세대 아파트는 200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대까지 지은 아파트를 일컫는다. 이후 2020년대부터 짓기 시작한 아파트가 4세대 아파트이다. 1세대 아파트부터 4세대 아파트까지, 한 세대가 끝나면 그 아파트를 모두 철거하고 다음 세대 아파트를 짓는 것이 아니었다. 각 세대 아파트는 공존하고 있었고, 시대가 지날수록 인구수가 늘어남과 함께 건설되는 아파트의 수도 늘어났다. 동시에 1세대 아파트의 재개발은 천천히 이루어져 아직 재건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던 1세대 아파트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요즘 강북권 최대 규모의 재건축으로 주목받고 있는 노원구 월계동 ‘미성·미륭·삼호’아파트, 일명 ‘미미삼’아파트도 1980년대 지어졌지만, 아직 재건축이 진행되지 않았다.
좁은 국토의 한국은 인구밀도가 높다. 그 때문에 토지이용 시 계속해서 효율성을 높여야만 하는 형편에 놓여 있다. 한국의 아파트 교체 수명은 27년이다. 일본은 54년, 미국은 72년, 프랑스는 80년, 독일은 121년, 영국은 128년임에 비해 유독 짧다. 더욱 높은 효율성을 위해 재건축이나 리모델링 등을 끊임없이 반복하다 보니 토지이용의 리사이클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다. 한국 아파트는 대부분 자가 소유 형태이고 이를 돈으로 환원할 수 있다. 따라서 다들 경제적 가치를 높여 자산을 불리고 계속해서 집값을 올리기 위해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은 리모델링, 재건축, 이름 붙이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아파트는 경제적인 부가가치나 사회적 차원에서 가장 주목받는 상품이다. 수익성, 안전성, 환금성, 그리고 차별성이 뛰어나다. 한국의 아파트는 이를 자가로 소유한 이들에 의해 재산으로서의 경제적 가치가 하락하는 상황이 절대 방치되지 않는다. 이는 ‘차별성’과 이어지는 부분인데, 아파트의 ‘구별짓기’는 현대 도시사회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최근 들어 아파트 단지의 브랜드화 역시 점차 심화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아파트를 통한 경제적 가치 추구, 특히 앞서 말한 ‘구별짓기’와 깊은 연관이 있기 마련인데, 자이, 롯데캐슬 등의 브랜드화로 차별화 전략이 시작된 약 10년 전부터 두드러지고 있다. 점점 더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아파트 이름을 길게 짓는다거나, 강남이 아닌 지역인데도 불구하고 ‘북 강남’, ‘서 반포’ 등의 방식으로 아파트 명칭을 결정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이러한 황금만능주의적 태도는 재개발을 추진하는 목적이 노후화된 건물의 안전 문제가 최우선임이 아니고, 오직 경제적 이득만을 바라며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표방한다. 사람이 아니라 돈이 중심이 되어 굴러가는 사회가 과연 타당하며, 옳게 흘러가는 중인가?
그렇다면 재개발을 추진하는 이들은 무엇을 잊고 있는가? 기존에 그 지역에서 살고 있던 주민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기본 생존권 보장이다. 포크레인이 건물을 허물고, 그 위에 새 건물을 짓는다. 그것은 무엇 위에 지어지는 것인가? 재건축은 주민들이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기억들 위에 건물을 지어 올리고 있다.
기억은 연속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억지로 지운다고 해서 깔끔하게 지워지지 않는다. 자신이 살던 아파트가 부서져 콘크리트 무덤으로 변해버린 것을 볼 때, 분명 놀이터가 있었고 나무가 자랐던 자리에 텅 빈 터만이 남아 있을 때, 쌓아 올린 수많은 추억은 온데간데없고 낯선 건물이 세워진 것을 보는 기존 거주민들의 심정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허망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건물을 허물고 지을 때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돈과 효율을 우선시하는 재개발 과정에서 우리는 사람의 마음에 조금 더 귀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기억할 수 있는 대상의 상실이란 얼마나 슬픈 것인가? 재개발 타겟이 되기 쉬운 역세권 동네들의 경우, 동네에서 늦은 밤까지 들리는 기차 소리는 재개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기차역이 있다는 것은 집값이 높아지는 데 큰 역할을 하므로 이 동네에서 거의 유일하게 사라지지 않는 존재로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차 소리와 함께하던 정겨운 풍경은 다시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기차 소리를 일상의 한 축으로 두며 살던 사람들도 이제는 떠나갈 것이고, 동네의 심장 박동처럼 존재하는 주민들의 발걸음 소리는 지금도 여전히 뛰고 있지만 곧 멈출 예정이다. 이 소리가 전부 멈춰 동네가 고요해지는 순간이 오면 이 오래된 동네는 사라지며 차갑고 낯선 새 동네가 펼쳐진다.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오래된 동네들은 공장에서 물건을 갈아 끼우듯 시간이 지날수록 훨씬 더 빠르게 사라지고 새것으로 채워지는 중이다.
재개발이 돈과 효율만을 좇게 되면 동네의 일부인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수만큼 많은 삶들을 잊고 지우며 무시하게 된다. 이 오래된 도시를 채우던 오래된 것들은 사라질 것이 되고, 이제 새로운 것들로 채워질 예정이다. 아무리 많은 추억을 담고 있어도 사라진 것이 되면 더 이상 아무 말을 할 수 없다. 그리고 곧 채워질 새것들도 빠르게 낡은 것이 되고, 또 다른 새것으로 다시 채워지기를 반복할 것이다. 점점 더 ‘빨리’, ‘높이’, ‘새롭게’를 원하는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땅의 주인은 빠르게 바뀌고 또 바뀐다.
집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다. 그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이동하기만 하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하이데거와 볼노브에 따르면 거주는 그 공간에 친숙해지며 삶의 확고하고 지속적인 근거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낯선 공간 안에 낯선 자로서 내던져진 상태는 거주라고 볼 수 없다. 집은 단순히 몸을 놓는 공간이 아니라 ‘나’ 스스로 완전히 속해 있다고 느 끼며 삶의 역사가 쌓여 있어야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이러한 공간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이와 동시에 한 인간의 삶의 중심이 무너져내리게 돠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집의 경제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산업화와 도시화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말해 편리성, 효율성만을 중시하는 도시 주거 공간의 문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능주의적 태도와 집의 경제적 가치에만 집착하는 세태가 인간에게 ‘주거’가 갖는 본래 의미를 빼앗고 있다. 현대 과학 기술이 모든 존재자들을 계산 가능한 에너지원으로 무자비하게 동원하고 지배함으로써, 모든 존재자가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발현하면서도 서로 조화와 애정을 갖고 운영되었던 ‘고향’의 세계를 추방해버렸다. 따라서 현대의 우리에게는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고향이 없다.
공간은 기억의 축적을 통해 만들어진다. 동네의 주인은 단순히 경제적 차원에서 땅을 소유한 이가 아니라 그 동네의 기억을 지닌 이들, 담장 모서리 반질거리는 손때를 만들어낸 이들이다. 수많은 발걸음으로 다져진 단단한 흙 같았던 동네는 이를 구성했던 주민들이 흩어짐과 동시에 붕괴하였다. 국가와 재개발 사업시행사는 흩어진 주민들이 떠돌이 신세가 되도록 떠밀고 있다. 돈에 눈이 먼 상태로 사업을 벌이고, 이익이 되는 부분만 챙긴 후 그 뒷수습과 피해는 세입자들에게 고스란히 안겨주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어느 특정 장소나 시간대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확인할 수 있는 한국의 모습이다.
가난을 개인의 몫으로 떠넘기는 태도는 국가의 무책임함과 무능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국민을 개인화에 빠지게 한다. 이러한 재개발 정책 등의 문제로 일자리가 부족한 상황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가난은 국가의 책임이다. 국가는 국민에게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
가난한 국민은 국가에 있어 ‘숨겨야 할 존재’인가? 1988년 올림픽 당시 외국 관광객들에게 가난한 서울의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며 달동네 재개발사업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서울 200여 곳의 달동네 세입자들은 아무 대책도 없이 몇십 년씩 살던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주민들은 최소한의 삶의 공간을 보장하라고 외쳤지만, 정부는 ‘철거 깡패’ 와 포크레인, 그리고 전투경찰을 앞세워 무자비하게 그들을 구속하고 집을 철거해 버렸다. ‘남에게 잘 보여야 한다.’, ‘외화를 벌어들여야 한다.’ 등 결코 생존권보다 앞설 수 없는 이유가 사람들의 존재를 지워냈다. 현재는 돈을 더 벌겠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집에서 내쫓고 있다.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의 재개발 세태에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이를 무시하면서 건물을 무너뜨리고 다시 짓기를 반복하다 보면 경고음은 더 이상 울리지 않을 것이다. 재개발이 초래하고 있는 부작용들은 터질 순간을 조용히 기다리다가,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아침 끔찍한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지금, 철거하고 있는 것은 건물이 아니다. 사람이다.
참고문헌
정밀아, 「청파소나타」(2020)
김민정, 「재개발에 갈 데 없는 가로수...폐기 땐 낭비 불가피」, 『국제신문』, 2022.07.01.
남근우, 「서울 고층집합주택의 전개와 아파트 살림살이」
진교훈, 『현대 사회 윤리 연구』, 울력, 2004
김동원(1988), <상계동 올림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