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읽기 II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은 다양하고 변화무쌍하다. 세상의 사물은 사물 자체와 절대로 일치하지 않는다. 사물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각으로 얻어지는 사물에 대한 지식은 확실하지 않고 주관적이다. 그렇다면 경험으로 알 수는 없어도 우리 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계가 존재할까? 개별적으로 사물에 변하지 않는 고유한 게 있을까? 만약 존재한다면 세상에 대한 우리의 묘사가 상대주의적 구속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플라톤은 있다고 하였고 이를 이데아라고 칭하였다.
어떤 동물을 생각하자. 예로 개라는 이름은 세상의 모든 개별적인 개를 총칭하므로 개의 공통적인 성질을 포괄하거나 결합한다. 사물들의 본질은 그들을 총체적으로 구분하는 보편적 형상에 있다. 플라톤의 주장을 들면 이를 이데아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데아는 어떤 사물을 총칭하는 이름일 뿐 실체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데아를 실체를 가지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플라톤은 이데아에 대한 설명을 ‘국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는 같은 이름을 적용하는 많은 사물의 집합에 대해 어떤 단일한 이데아를 상정하곤 한다.’ 플라톤은 이데아 그 자체에 관해서 관심이 있었다. 아름다움의 이데아는 그 자체로서 완벽히 아름답다고 했다. 무슨 뜻이냐면 이데아로서 아름다움은 단지 아름다움일 뿐, 다른 어떤 것과 비교된 것이 아니고 결합한 것도 아닌 완전한 그 자체라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향연’에서 잘 묘사되는데 이렇게 하면 아름다움은 세 가지 종류가 된다. 첫째로 아름다움 그 자체, 둘째로 이데아에 참여한 개별자 속의 아름다움과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사물들 자체이다. 그중에 첫째만이 어떠한 개별자 속에 들어 있지 않아 영원하다. 우리가 꽃이 아름답다고 할 때 꽃은 사물의 집합이고 이데아는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개별자는 이데아에 단지 참여만 하므로 이데아의 완전한 실현은 아니다.
이데아는 사물보다 앞서 존재하여 항상 변하는 사물들과는 달리 변하지 않는 사물의 원초적이고 영원한 초월적 모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각적으로 파악하는 개별자들은 이들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사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데아는 원본의 개념과 유사하다. 개별 대상들은 생겼다 사라지지만, 그것의 이데아는 하나이며 영원히 존재한다. 이데아는 실재이며 개별자들은 그것의 단순한 현상이다. 이데아와 개별자는 일방성만 있으므로 일상 세계는 불완전한 이데아들이 한시성을 가진 상태의 연속이다. 이데아는 정신적인 것도, 물리적인 것도 아니지만 실재하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불변이다. 이데아는 무수히 많지만, 이들은 논리적으로 연계되어 있어 혼란스럽지도 무질서하지도 않다. 이데아들은 논리적 질서에 의한 계층이 있다. 잘 조직되어 합리적 우주를 형성하게 하고 상호 연관된 유기적 통일체를 형성하여 이데아들은 최상위의 이데아에 포섭된다. 모든 이데아의 원천인 최고의 이데아는 바로 선의 이데아이다. 선의 이데아는 우주적 목적으로 우주를 선의 이데아에 의해 지배되는 유기적 통일체로 파악한다.
이데아는 감각으로 파악될 수 없고 개념들은 초자연적 실체로서 이들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이성이고 이것이 철학적 과제이다. 인간 이성은 변증이나 상기를 통해서 이데아를 발견할 수 있다. 변증으로 사물의 본성에 관한 지적인 탐구를 통해서 사물들의 상호 관계를 이해하여 사물의 본질을 알아낸다. 또한 태어나기 이전에 기억되었던 이데아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켜 이데아를 이해할 수도 있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하기 전에 이미 이데아들에 친숙해서 인간의 영혼에는 이데아에 대한 지식이 선험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인간은 전(前) 존재에서 분명하게 본 이데아들을 회상하여 사물의 본성에 대한 인식을 한다. 사랑으로서도 가능한 데, 어느 특정한 대상에 대한 사랑은 그와 유사한 모든 형상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고, 나아가 외형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발전한다. 그러므로 이성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인식을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이데아의 세계로 단계적으로 이끌어 이데아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기론이나 사랑으로 이데아를 볼 수 있다는 주장은 얼핏 와닿지 않는다. 그러나 이데아로 나아가는 길은 진리에 대한 사랑이 없이 가능하지 않으므로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를 이성이 변증을 통해 이데아를 발견하도록 밀어붙인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과 변증의 방법을 연계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성이 이데아를 보는 방식을 수학에서 찾아낸다. 우리의 언어 구조가 이데아 세계에 접근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방법은 수학적 지식을 통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기하학의 공식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이어서 논쟁의 여지가 없다. 피타고라스 정리가 적용되는 삼각형은 이상적이고 일반적이다. 정리는 사람들이 공식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리는 삼각형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삼각형 자체와 일치하며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이상적 삼각형에 적용된다. 더 나아가 사람들의 주관에 공식은 좌우되지 않는다. 플라톤은 이러한 기하학의 모형을 사물에 대한 묘사 언어의 형태 구조를 밝혀 불변의 것을 찾는데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데아는 문장을 통해서도 파악된다. 문장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같은 특성을 다수의 주어에 부여하는 구조이다. 예를 들면, '논리적 판단은 옳다, 구입한 가격이 옳다, 누구는 옳다' 등 술어는 모두 '옳다' 하나인데 주어는 다수에 적용된다. 이때 주어는 술어에 의해 부여받은 특성과 확실히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술어는 불변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술어는 불변이고 수식되는 주체나 상황은 변한다. 술어들이 표현하는 특성은 객관적이고 절대적이다. 그래서 모든 술어는 대상 주어의 우선적인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술어인 ‘옳은’은 그 자체로 옳은 것이라고 불리는 정의라는 이데아라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만약 주어가 술어가 묘사하는 특성을 100% 소유할 때는 특성과의 대체가 즉각적으로 가능해진다. 마치 삼각형의 이데아가 세 면을 가진 내각 180도인 도형의 정의와 완벽히 대체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주어와 술어의 쓰임에 대한 언어구조가 이데아 세계에 접근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플라톤은 주어보다 술어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런데 존재는 주어에 있고 술어는 주어의 존재를 가리키는 보조적 수단은 아닐지? 이데아는 후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반박되면서 존재 여부를 의심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