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의 핵심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인데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중심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이 사는 방법을 얘기해 보자. 니코마코스는 아들의 이름이자 아버지의 이름이지만 아들을 지칭하는 게 틀림없다. 그의 유언장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자상하고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이러저러하게 살라고 희망하며 아들의 이름을 딴 윤리학을 만든 것은 생소하지 않다. 더군다나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이라고 알려진 제목들, 자연학, 형이상학, 동물학 등등 - 은 모두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고 대부분이 강의록이므로 내용과 관련이 없는 제목이 붙어 있다. 예를 들어 자연학은 ‘듣기 과정 course of listening’의 제목이 붙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제목이 제대로 붙은 유일한 작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같이 윤리 이론을 소크라테스가 말한 최고선에 어떻게 도달하는가에 대한 방법론적 시도로서 고려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금욕주의적 입장인 데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을 취하는 태도다. 최고선에의 도달은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이므로 최고선은 그 자체로 궁극적 원리가 되어 인간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실현하는 것으로 동물과 차별 짓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본성의 실현은 이성적 사고의 덕을 가르침으로부터 추구하므로 완성된다.
그의 윤리 이론의 토대는 형이상학과 심리학(영혼학)이다. 윤리 이론의 골격은 인간 이성의 두 부류인 비이성과 이성적 부분의 합리적인 조화이다. 영혼은 이성으로만 구성되지 않고 비이성적 부분도 함께 있어 이성은 이것들과 협력해야 한다. 윤리학은 형이상학과 심리학이 이론적 토대가 될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관한 발전적 형태를 기술하므로 자연과학의 체계적 구성의 연장선에 있다. 인간의 최고선은 인간을 인간적으로 만드는 기능들의 완벽하고 습관적으로 발휘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에우다이모니아(행복)라고 불렀다. 이때 행복의 의미는 주관적이 아니라 객관적인 관점에서 삶의 가장 바람직한 방향을 의미한다. 즉, 개개인이 달리 정의하는 행복이 아니라 보편적인 잣대로 쓰일 수 있는 행복을 말한다.
전체를 거처 ‘덕’을 매우 빈번하게 얘기하는데 행복은 덕을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때 덕은 오늘날의 도덕적 의미하고는 다르다. 일종의 기술 또는 기질의 탁월성 정도로 이해될 수 있는 덕은 소크라테스가 ‘앎은 덕이다’라고 할 때의 그 덕의 의미와 같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때 단순히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이지 않을 경우도 많을 수 있다. 도덕적이란 나 자신의 타자에 대한 배려를 담보로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은 타자에 대한 배려 대신에 자신이 성공적으로 살기 위하여 무엇이 중요한가를 논한다. 행복이란 덕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므로 덕의 이면에 있는 핵심은 행복이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원하므로 단어가 주는 보편적이고 통일적 의미가 모든 개체에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이라는 의미는 뭐가 있어서, 무엇을 가져서 행복이라기보다 무엇을 쌓아가므로 생기는 행복이라는 진행형의 의미가 강하다. 즉, 번성한 삶으로서의 행복을 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그의 윤리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행복의 추구는 중용의 자세를 취함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중용은 이성적 사유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올바른 사유는 쾌락만의 좇음 등을 중독으로 치닫게 하지 않으며 절제력을 가지고 자신을 다스릴 줄 알게 한다고 하였다. 그의 형이상학의 첫마디가 ‘인간의 본성은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함에 있다’라는 일갈은 다 이유가 있었다. 감각적인 것을 싫어한 것은 노력으로 이성적 사유로 삶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적 사유는 단순 생각이 아니라 꾸준한 지식의 습득을 통해서 성장하고 있는 생각을 말한다. 그런 행위가 동물과 인간을 더욱더 분리할 수 있는 것임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돈과 권력 또는 쾌락은 중독이고 절대로 행복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가치를 어디에다 두느냐에 인간의 행복이 달려 있는데 중독성인 감각적인 것들은 중용을 취하라는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조건에 가장 중요한 것은 탁월함인데, 탁월하기 위해서는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것 대신에 이성적인 탐구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인 것에 머무는 것을 매우 싫어한 것 같다. 왜냐하면 감각적인 것은 동물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감각에 너무 치우치면 동물과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감각에는 건강한 습관을 권장했고 실천적 지성을 원했으며 이성을 커다란 보호막으로 인간은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자신의 행복은 중용을 택하여 살면서 추구하는 잘못, 무절제를 멀리하고 관조하는 삶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권한다. 관조하는 삶은 곧 이성적인 삶이다.
그러나 그의 행복을 위한 시작 지점이 사뭇 흔쾌하지는 않다. 그는 행복을 위해 어느 정도의 돈을 소유해야 하며, 준수한 외모, 훌륭한 조상과 좋은 가족을 가지는 것을 선제 조건으로 꼽는다. 이러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최상의 번성한 삶으로서의 행복을 성취하지 못할 수도 있으므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행동을 자신이 처한 삶의 특수한 상황에 맞출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을 내세우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기준은 살아가고 있는 대상들을 모두 같은 기준으로 판단하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는 같은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어 절대적 기준은 없을 수 있다. 인간을 너무 높은 차원에서 일반화시키려 함으로써 생기는 오류일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범한 엘리트주의자이다. 물론 그가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고 더 나아가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다만 2천4백 년 전의 아리스토텔레스가 환생하여 오늘날 묻지마 집단을 본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들은 동물적으로 살고 있다고 질책할 것이다. 그의 윤리학은 오늘날도 적확하게 적용될 수 있을 만큼, 아니 그 당시에 사람들도 오늘날과 다름없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위한 불행한 가지 수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언제나 많이 원한다고 그는 설파한다. 원함이 즐거움을 위한 것인데 중독에 이르기 쉽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진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