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가 집대성한 인간과 자연과학의 통일 이론이 완성된 후에 철학의 구심점은 새로운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은 비단 아리스토텔레스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자연과학이 더는 어떤 이슈를 만들지 못했으며 오히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등의 인간 과학이 커다란 화두가 되었다. 그것도 담론보다는 실천 쪽으로 크게 기울었는데 에피쿠로스, 스토아, 회의주의 및 신플라톤주의가 그것이다.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스토아학파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이라는 실체 개념을, 회의주의자는 소크라테스의 회의론적 방법을,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각기 다른 선대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그들이 추구하는 방향은 같았다. 모두 실천에 강조를 두었으며 사회나 국가보다는 인간 개인 중심의 분위기를 띠었다. 그러므로 이론보다 살아가는데 기술로서 철학이 강조되었다.
그렇다고 철학의 실천 부분이 이 당시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본시 그리스 철학의 진정성은 일상 속에 있었다. 철학적으로 사는 것은 지적이고 정신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덕과 앎은 같은 것이다. 플라톤 역시 덕이 곧 학문이었다. 플라톤의 학교인 아카데메이아에서는 이해관계를 떠난 탐구를 실천하고자 하는 공동 의지를 통해 철학적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이처럼 담론과 실천을 동시에 가진 플라톤식의 철학적 활동은 비단 플라톤 학파만이 갖고 있던 방식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직접 계승한 메가라학파를 비롯한 여러 분파,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와 스토아학파도 소크라테스적 전통을 따라 선에 대한 사랑을 인간 존재의 기본적 본능으로 삼았다. 예외적으로 인간 활동에 쾌락의 동기 부여가 주요 신조인 에피쿠로스 주의가 있지만, 실천을 중시한 것은 마찬가지다. 단순히 가치 판단의 유예를 생각했던 회의론자들도 유예가 자신들의 생활방식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했다.
BC 4세기에서 AD 3세기까지의 기간에 철학한다는 것은 어떤 생활양식을 선택한다는 것이었다. 아카데메이아, 뤼케이온, 에피쿠로스 정원, 스토아 등의 그리스식 학교는 배움터를 넘어 일종의 공동체였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표가 있을 것이고 이것들을 기반으로 하는 생활양식의 형태가 존재했다. 이들 학교는 모두 토론 형식을 빌려 변증론, 수사학, 독단론, 회의론의 형태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는 연구, 탐구 또는 관조할만한 여유를 가진 엘리트 계층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으나 에피쿠로스나 스토아 주의자는 성격상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었다. 키니코스 주의도 대중에게 오픈된 것은 마찬가지다.
핼레니즘 시대까지 보편적으로 행해진 토론 방식은 로마 시대에 텍스트에 주석을 한다는 형식으로 대체되었다. 논변에서 권위 있는 텍스트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어 플라톤의 대화편,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문 등이 주로 쓰였다. 이 시기의 철학은 문화적 소양을 위해 철학을 아는데 만족한 경향이 짙다. 문제 자체나 사물을 직접 논하지 않고 대신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문제에 뭐라고 했는지에 대해 논하는 형식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후대의 중세 스콜라철학에 이어져 철학의 정의가 마치 권위 있는 어떤 텍스트를 자발적이고 의식적으로 다듬은 사유의 이성적 형식인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였다.
AD~4세기에 신플라톤주의가 부상하면서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 주의, 키니코스 주의는 없어지게 되었다. 신플라톤주의는 담론과 실천 중 어느 하나 치우치지 않고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는 플로티노스의 목적이 지고의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봐서도 알 수 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경이로운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갑작스러운 깨달음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의 목표가 사유에 대한 사유의 관조로 행복을 누리자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플로티노스는 실재가 시원적 단일체로부터 발생했다고 주장하였다. 일자(또는 선)에서 시작하여 지성, 영혼 마지막으로 감각적인 것들이 현현한다고 주장하고 삶의 목표는 영혼에 따르는 삶 또는 지성에 따르는 삶이었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언급되는 최고 선으로서의 신이 그의 주된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일정 부분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그리스 시대와 헬레니즘 그리고 로마 시대의 철학은 모두 담론과 실천을 중시하고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실행하므로 철학적 담론과 삶의 형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회의주의와 키니코스학파 정도를 제외하고 모든 다른 학파는 논리학, 윤리학과 함께 자연과학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얼핏 보기에 실천의 입장에서 자연과학이 생소할지 모르겠으나 그들은 자연과학이 대자연에 대해 관조를 할 수 있게 하므로 인생에 가치와 의미를 준다고 보았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는 사유 운동을 통해 영혼을 모방하고 그로써 인생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연 탐구의 실천은 영혼에 기쁨을 주는 행위이며 삶의 지고한 행복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에피쿠로스에게조차 자연학 훈련은 신에 대한 두려움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치는 일로서 매우 중요했으며, 스토아 주의자들에게는 자연에 대한 관조를 영혼을 고귀하게 하는 것이었다. 결국, 알아야 뭐든 더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 부분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강하게 연상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수백 년 동안 나타난 실천 행동과 관련된 철학 활동은 기독교 신학이 철학을 흡수하고부터 없어졌다. 실천은 기독교의 역할로 대체되었다. 기독교가 어떻게 사는가를 가르쳐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부들이 주장해 온 것처럼 철학을 신학의 하녀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플라톤 사상이 흡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