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는 오늘날 유럽의 어느 특정의 시기로 여겨지지만, 근대 초기인 500년 전에는 시대라고 할 수 없는 시대라는 경멸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즈음은 소위 인간 이성이 놀라운 능력을 보이기 시작하여 신에 의지하지 않고 이성으로 무언가를 알 수 있다는 주장이 득세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데카르트의 묘비에 ‘인간 이성을 처음으로 옹호한 인물’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을 만큼 이성 찬양은 시대의 총아가 될 만큼 이전과는 너무 달랐다. 그렇게 이성이 중요하다고 여겨졌던 시대에서 뒤돌아본 중세는 분명히 암흑의 시대였을 것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중세가 없었다면 이성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중세가 바로 천년 가까이 신앙과 이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온갖 담론이 벌어졌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결국은 각각의 정당화를 거쳐 분리가 이루어져 중세가 종말을 고했지만 말이다. 신앙과 이성의 거대한 담론의 기나긴 시대였고, 보편자와 개별자의 투쟁은 그토록 오래 진행되었다. 그러나 신앙과 이성 투쟁의 출발점은 중세가 아니다. 중세철학의 전제와 발전은 교부철학을 담보로 한다.
교부철학은 분명히 중세와 다르고 헬레니즘 시대와도 다르다. 초기 기독교와 헬레니즘 철학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교부철학은 철학이 신학에 편입된 첫 번째 사례이다. 교부철학에서 유일하게 돋보이는 인물은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원후 4세기에 신플라톤주의를 신학과 접목하여 기독교를 사상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플라톤의 사상에 신적 체계를 접목한 신플라톤주의는 초기 기독교 교리에 그리스 문화를 수용하여 플라톤의 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의 철학적 교리를 신플라톤주의에서 끌어낼 수 있었다. 이로써 기독교는 철학을 신학에 편입하므로 기복신앙을 벗어나 담론의 대상으로서의 철학적 교리를 가지게 되었다. 교부철학의 중심은 신앙이 주였고 이성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고 보편만이 강조되어 개별은 오직 보편에 의해서만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기독교적 요소와 플라톤 사상을 결합한 교부철학은 중세에 담론의 재료를 제공하여 신앙과 이성에 대한 논쟁에 출발점이 되었다.
통상 중세는 기원후 6에서 16세기에 이르는 기간을 이른다. 중세의 시작을 정확히 AD 529라고 집어내기도 그 이유가 있다. 이때가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가 실로 900년 만에 폐쇄되었고 동시에 수도원이 처음으로 설립(베네딕토)되었던 해였기 때문이다. 사유의 담론이 학교에서 교회로 넘어갔다. 이러한 변화를 계기로 신플라톤주의, 스토아 철학 및 에피쿠로스 주의의 헬레니즘 정신세계가 물러가고 스콜라 철학의 신앙 기반의 세계가 들어섰다.
중세 시대를 알리는 첫 인물은 시대의 경계에 있었다. 몰락하는 시대에 살면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려 했던 보에티우스다.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위안’ 저작으로 매우 유명하다. 억울한 죽음을 목전에 둔 어둠 속에 그의 필치는 내부적으로 깊고 슬프며 외부적으로 잔인하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자로서 번역에도 큰 역할을 하여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번역에도 힘을 기울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 중에 명제와 범주가 그에 의해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그러나 그가 첫 번째 스콜라 철학자로 불리는 이유는 번역물 보다 그의 논문들 때문이다. 논문은 성서 인용 없이 신학 문제를 다루어 신앙에 이성의 무게를 얹어 신앙과 지식을 결합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보에티우스에 이어 카시오도르는 그리스 사상서 판본들을 수도원에 보관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스콜라 철학은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강력히 지지하였다. 조화의 중심에는 인간 이성만을 주장하여 계시 같은 것을 믿지 않는 합리주의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계시를 수호하기 위하여 중세 전체를 통틀어 기원후 500년에 만들어진 어떤 글모음(디오니소스 아레오파기타)의 내용에 근접해 있는 사고를 유지하였다. 이처럼 기독 신앙에 관한 경건주의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는 성서 같은 권위로 천 년 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그 전통을 따르지 않으려는 사제도 나오게 되는 법이다. 이성의 힘으로 신앙의 신비를 밝혀낼 수 있다고 믿은 안셀무스는 이 글모음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합리주의에 가까운 그의 사상은 보에티우스의 신앙과 이성의 결합 원칙을 지적 이해의 신앙 추구와 지적 이해를 위한 믿음으로 주창하여 성서보다는 이성에서 근거를 찾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신 존재 증명은 이러한 기본 사유에서 바탕을 이룬다. 안셀무스의 합리적 논증도 있지만, 복음 선포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베르나스두스도 있었고 이 모두를 받아들인 빅토르의 후고도 있었다.
스콜라 철학은 12세기에 아랍어로 쓰인 그리스 사상서들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커다란 전기를 맞게 된다. 기원 후 5세기 서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침략자에 의해 서유럽은 문화적 쇠퇴에 빠져 버렸다. 고전 그리스 학자들의 거의 모든 지적 유산을 잃어버려 사장되었다. 그 와중에 다행스럽게도 이슬람 사회는 8세기부터 오늘날 알려진 모든 그리스 사상을 받아들여 전승하였다. 특히 그들의 주된 연구 대상의 사상가는 아리스토텔레스였다. 12세기에 이슬람 학자인 아베로에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주해에 온 힘을 쏟았고 곧이어 서유럽에서도 그의 사상의 중요성을 파악한 첫 번째 중세 신학자인 알베르투스가 등장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수많은 저작의 등장으로 신앙과 이성의 결합은 더 어려워지고 더 까다로워지게 되었다. 이성을 인간이 마주하는 실제 현실을 파악하는 인간의 능력으로 포괄적이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는 안되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그의 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로 이어진다. 13세기였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 스콜라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와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자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신앙과 이성의 결합을 위해 창조만이 유의미하다는 극보수주의자들이 무성했다.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적 실제 세계를 오직 이성을 근거로 사유하는 극단적 합리주의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도 대두했다. 극단주의자는 신앙과는 무관하게 자연을 연구하여 신앙은 방치시켰다. 철학 공부가 실제 사물들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으로 정의한 토마스 아퀴나스와 극단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와 관점이 달랐음에도 1277년 교회는 단죄로 이들을 막았다. 그러나 1278년 도미니코 수도회는 아퀴나스의 이론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논쟁과 교회의 단죄 등 여러 과정은 결국 신앙과 이성을 통한 결합을 위한 노력이 각각의 정당화를 통해 분리가 이루어지게 된다. 결국 신앙과 이성의 완전 분리를 주창한 오컴의 유명론은 스콜라 철학의 붕괴를 의미했다. 붕괴는 이성의 자유를 함의했다. 이후 이성으로 생각하여 새로운 지식을 알아내려는 풍조는 유럽의 엘리트들을 움직였다.
이성과 신앙의 분리는 천년의 기간을 거쳐 고난도의 사유를 통한 논쟁의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중세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꾀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잉태하면서 끝을 맺었다. 중세는 근대를 촉발한 역동의 시대였다. 암흑의 시대가 아니었다. 중세 없이 근대는 올 수 없었다. 신앙과 이성 간의 논쟁은 보편자와 개별자 논쟁을 신앙적 측면에서 바라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