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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희 Mar 10. 2021

보편과 특수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중세 시대에 가장 근본적이고 주된 화두는 보편자와 개별자에 관한 문제였다. 이 문제는 인간이 생각하는 대상과 밖에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을 어떻게 연관시키는가에 관한 것이다. 밖에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은 무수히 많고 개별적이지만, 인간의 정신에 있는 대상은 하나이고 보편적이다. 우리가 인간을 보고 인간이라고 단정 지을 때,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은 여럿이지만 사유 속의 인간은 하나이고 보편적 성격을 띤다. 즉,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철수라는 특정인이지만 정신 가운데 인간은 보편적으로 총칭되는 인간이다. 철수는 개별적 사물이고 인간(종), 동물(류) 등은 보편적이다. 이를 개별자와 보편자라 한다.

 

보편자와 개별자의 연원은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편자는 플라톤이 주장한 이데아를 뜻하여 각각 사물의 완전하고 이상적 원형으로의 참된 실재를 의미한다. 이때 개별자는 감각으로 알 수 있는 실제의 사물로서 보편자는 하나이지만 개별자인 사물은 다수이다. 언급했다시피 플라톤은 보편자를 사물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라고 보았다. 이를 보편자는 개별자에 앞서 존재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앞선다는 의미는 보편자가 이상적 원형이므로 개별자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형상)는 존재하되, 사물에 내재하여 있다고 주장하여 이를 사물과 같이 또는 함께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즉, 보편자는 개별자 안에 함께 존재한다.


그런데 보편자와 개별자의 관계에 대한 의문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보편자는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인간의 지성 가운데 있는 사고에 불과한 것인지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만약 보편자가 실재한다면 그것이 물질적인가 아니면 비물질적인가. 언급한 대로 그것들은 감각적 사물과 독립해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사물 안에 있어 그 안에 속하는가 등의 여러 근본적인 질문이 제시될 수 있는데 이러한 질문은 보에티우스가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크게 요약하면 보편자는 실체로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단지 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이름에 지나지 않는가 하는 문제로 축약할 수 있다.


중세에 보편자 이슈가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가 된 것은 신학 논쟁과 깊이 연결되면서 큰 학문적 쟁점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중세 내내 보편 논쟁은 삼위일체설과 같은 다양한 기독교 논리와 현실에서 신의 존재 여부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종교적 학문적 정치적 논박이 있었다.


보편자 논쟁에 대하여 스콜라 철학은 여러 다른 입장이 있었으나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하나는 보편이 현실에서도 존재하며 개별적인 것들보다 더 우위에 선다는 플라톤적 형태로서 초기 스콜라 철학의 보편자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일테면 빨강의 보편적인 개념이 각각의 개별적인 빨간색 사물들보다 앞서서 존재한다는 견해다. 보편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이 실재론이다. 반면에 보편자 개념은 그저 언어의 단어일 뿐으로 만들어낸 말에 불과하고 현실에서 존재하는 것은 개별자들 뿐이라는 견해가 있다. 빨강은 그저 단어일 뿐이며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각각의 개별 빨간색 사물들 뿐이라는 것이다. 보편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이름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유명론이다.


초기의 스콜라 학자 에리우게나, 안셀무스 등은 실재론을 주장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이 보편자이며 가톨릭 교회는 그저 개별자들의 집합 모임이 아니라 이를 뛰어넘어 자체로 존재하는 보편자로서 여겨졌다. 사물에 ‘앞서’ 존재하는 보편자로서 신앙이 이성을 압도하여 인간 이성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극도의 수동적 행위자일 뿐이다. 유명론은 11세기에 이미 고개를 드는데 교회에 의해서 이단으로 배척받았다. 유명론의 입장은 사물 ‘뒤에’ 단순한 이름으로서의 보편자이므로, 보편자로서 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신앙보다는 인간 이성을 더 중하게 여기는 성향으로 인간 이성으로 신앙을 이해한다는 신앙적 관점을 유지했음에도 이단으로 치부되었다.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편자가 사물의 ‘안에’ 형상으로서 존재한다고 하는 절충적으로 완화된 실재론을 주장했다. 이것은 다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와 방법을 따라 내재적 형상 개념으로서 보편자를 다룸으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주장하였다. 신앙의 계시 등과 관련된 모든 교의는 믿음의 문제로서 이성을 초월하지만, 이성과 대립하지는 않는다. 인간 이성의 능동적 행위를 조화로운 범위 내에서 받아들인다. 그러나 13세기 후반 이후, 스콜라 철학이 말기에 가까워짐에 따라 신학과 철학을 완전히 분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즉, 신앙과 이성은 서로 다른 영역으로 각각 별개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둔스 스코투스의 주장은 유명론을 다시 담론의 장으로 나오게 하였다.


14세기에 윌리엄 오컴을 중심으로 유명론이 발전됨에 따라 스콜라 철학의 붕괴가 진행되었다. 개별자만이 존재하고, 실재는 보편자가 아니라 개별자라는 전제 위에 그의 철학을 세웠다. 정신이 보편 개념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정신이 인식하는 것은 개체나 개체가 가지고 있는 성질일 뿐이고 보편 개념은 개별자의 집합을 나타내는 용어이거나 단어일 뿐이다. 이러한 주장은 바꿔 말하면 이제까지 인간의 현실 생활을 규제하고 있던 보편으로서의 교회가 점차 그 힘을 잃어가고, 이에 대신하여 교회의 지배로부터 독립한 개개의 인간이 적극적인 자기주장을 시작하게 된 것에 대한 사상적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개별적 사물만이 진실한 실재라는 존재론적 주장은 인식론적으로 볼 때, "사물에 대한 이성적ㆍ추상적인 인식의 근본에는 감성적ㆍ경험적인 인식이 있다"라는 주장으로서 이것은 근대 경험론의 입장과 연관된다. 윌리엄 오컴의 유명론은 근대의 유물론적 경험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스콜라 철학의 붕괴는 이성의 득세를 의미한다. 인간 자신이 이성으로 정진하여 새로운 지식을 알아내려는 풍조가 유럽을 휩쓸게 된다. 이제 신앙은 구원의 대상일 뿐 새로운 지식을 가져다주는 만능이 아니었다. 지식은 인간 이성이 찾아내야 할 대상이었다. 이성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철학의 화두가 되었다. 이렇게 중세는 근대가 이성의 깃발을 휘날리며 나아가게 하는 길을 터 주었다.  


그런데 중세와 근대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의 르네상스 시대가 없었다면 이성이 제 발로 일어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중세가 끝을 맺으면서 종교와 철학의 융합은 뒤틀리기 시작하는데 르네상스 동안 둘 사이는 결정적으로 파탄에 이른다. 르네상스는 15, 16세기에 일어난 고대 그리스 학문의 부활이었다. 12세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고대의 많은 철학자와 위대한 작가들의 저작물들에 대한 번역이 이루어졌다. 중세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제외하고 다른 그리스 사상가들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에서 보았던 플라톤 등의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에 대해서는 오직 간접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번역 작업을 통해 저작을 접한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사상가 중의 한 명일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당시에 소개된 회의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도 틀릴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변화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 및 스콜라적인 방법론들이 점차 세력을 잃게 되었고, 대신 플라톤 철학이 주요 관심 대상이 되었다.


플라톤에 관한 관심이 되살아나자 에피쿠로스, 스토아 및 회의주의에 관한 관심도 다시 일어났다. 이와 같은 고전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진리의 발견에 이성의 역할을 중심에 두는 인문주의 철학이 등장하였다. 인문주의자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문제들이 종교에 의해 알려지지 않고 인간 이성에 의해 연구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기간에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간 이성의 홀로서기의 여건이 이 시기에 구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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