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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희 Mar 29. 2021

경험주의

철학 혁명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귀납적 방법을 주장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선도적 역할은 영국에서 경험주의가 중심 사유가 되는 것에 여하 간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중세에 드물게도 경험이 참다운 지식의 원천이라고 주장한 로저 베이컨, 유명론의 윌리엄 오컴 모두 영국인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합리주의가 이성을 통한 관념들의 질서와 관계가 곧 사물들의 그것들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지만, 경험주의는 경험을 중시하고 경험적인 사유를 옹호했다. 경험주의자는 합리주의자가 오로지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추론할 수 있다는 준거가 되는 본유 관념을 먼저 부정하면서 인간이 확실성보다는 개연성을 기반으로 사고하고 인간의 지적 능력을 오직 경험에서 습득한다는 점을 내세운다.


존 로크는 인간이 어떠한 지식을 취하는데 본유 관념이 필요치 않다고 주장한다. 어린 아이나 야만족이 본유 관념에 속하는 지식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로크에게 인간의 지식은 경험을 쌓기 전에는 백지상태와 같다. 인간 지성은 오직 외부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관념들을 백지 위에 기록해 나간다. 경험은 감각들을 통해 얻어지는 외부로부터의 지각과 심적 상태들에 대한 내적 지각인 반성의 두 가지로 분류되어 감각을 통해 들어온 정보에 반성이 작용한다.

 

관념은 단순과 복합 관념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감각 또는 감각과 반성의 결합으로 생겨나지만, 후자는 단순 관념을 조합하는 정신 활동의 결과이다. 단순 관념은 객관적 및 주관적 관념으로 이루어져 수, 행태, 연장, 딱딱함과 같은 것들이 객관적 관념으로 제1 성질이고 오감을 거치는 것들은 주관적이므로 제2 성질에 속한다. 복합 관념은 단순 관념의 기억을 토대로 형성되는데 어떤 양상, 실체 또는 관계에 관한 생각들이다. 그러므로 복합 관념은 경험으로부터 습득한 단순 관념들로부터 추상화, 일반화, 조합을 거친 것이다. 복합 관념은 그저 지성의 결합 작용에 의한 것으로 원리적으로 현실에서 이와 대응되는 것은 없다. 특히 모든 보편적 개념이 그렇다고 주장하여 로크는 유명론의 입장을 따른다. 그러나 로크는 실체에 대해서는 예외로 두었다.


로크가 경험주의 발전의 기초를 마련했다면 버클리와 흄은 이를 더욱 발전시켰으나 서로 방향은 달랐다. 버클리는 로크의 입장을 받아들이지만, 우리가 지각하여 인식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의식의 현상일 뿐으로 우리의 정신 상태에 주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로크의 제1 성질과 제2 성질을 구분할 필요도 없고 실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세계에는 사유하는 정신과 그 안에 현존하는 관념만 존재하며 외부에 어떤 것이 존재하든 않든 아무 관계가 없다. 고로 버클리의 입장은 철저한 관념론이다.


데이비드 흄은 로크의 사상을 기반으로 관념의 조합 이론을 발전시켜 로크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얻는다. 감각으로 얻어지는 것은 강력함이나 생생함의 강도에 따라 인상과 관념으로 나뉜다. 인상은 외적 지각이나 내적 지각으로 현실적으로 분명히 주어지는 것으로 인간의 뇌가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외부 대상에 대한 감각과 분노ㆍ의지와 같은 내적 경험이다. 관념은 인상에 대한 기억 또는 상상력을 의미하여 반드시 직관적인 인상들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흄은 관념을 우리가 생각하고 지각하는 것으로서 의식의 전체 내용을 의미하던 로크와 버클리보다 협의의 의미로 사용했다. 모든 관념의 의미를 축소해 사용한다. 관념은 각각의 인상에 상응하는 단순 관념과 그것들이 모였을 때 생겨나는 복합 관념으로 분류된다. 인간의 지성이 가지고 있는 창조적 능력은 순전히 외부로부터의 감각과 내적 경험에서 제공된 재료들을 혼합하여 정제한 것 그 이상이 아니다.


관념들이 조합을 이루어 새로운 관념이 생성되는 계기는 유사성이나 공간과 시간의 연속성 또는 인과성으로 마련된다. 이 가운데 인과관계가 새로운 관념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인과적 연관은 병존과 연속의 관계로서 하나의 현상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거나 연속해서 일어날 때를 의미하는데 이를 통한 새로운 관념은 원인과 결과로 분리된다. 그렇지만 수많은 반복 과정을 거친 연속 과정이라도 그러한 연속이 무한히 반복되리라는 확실성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못한다고 흄은 주장한다. 즉, 개연성을 바탕으로 한 인과적 연결을 통한 결과가 필연적은 아니다. 우리의 예측은 지금까지 늘 그래 왔다는 경험에 근거한다. 이러한 믿음은 지금까지의 수많은 관찰로 정당화될 수는 있지만, 확정적은 아니다. 여태까지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내일 또 그럴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경험주의로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주제에 앎의 한계가 설정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제한은 흄이 인식 능력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는 회의주의로 치닫는 데 일조한다. 흄에 의하면 모든 지식은 개연적이고 확실한 것이 아니다. 고로 지식은 형이상학의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인간의 삶에 중요한 신조인 습관이나 믿음과 같은 초이성적 요소들이 세상을 사는 인간들이 인식론적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증명되거나 반박될 수 없다. 그런 앎은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물이 아닌 주관적 인상들에 불과한 이러한 관념들에 대한 숙고가 회의주의다. 관념들이 사물에 대한 관념이 되게 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초월적 존재인 신이 없을 때 회의주의가 된다. 흄의 경험주의는 궁극적으로 회의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배운다고 해서 형이상학의 진리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흄의 주장은 자연과학의 성공에 대해 비판적이며 철학의 형이상학적 담론의 불가를 함께 싸잡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흄은 자연과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수학에 대해서 절대적 확실성을 인정하고 다른 학문에 대해서 확실성은 아닐지라도 높은 개연성을 부여한다. 다만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것을 진리라고 얘기하는 철학의 독단적 형이상학자들을 겨냥한 것은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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