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론자들
일원론은 자연의 근원에 대한 의문과 그것의 변화와 존재에 대한 생각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렇다고 자연이 반드시 하나로부터 비롯될 이유는 없다. 근원으로서 하나는 부분적으로 충족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만일 여럿일지라도 여럿을 통일시키는 무엇이 있다면 오히려 다원론이 적당할 수도 있다. 자연에 대한 의문의 답은 일원론에서 다원론으로 옮겨갔다. 선대 학자들의 탐구를 결합하고 조화시키려 노력하면서 다원론은 발전하였다.
자연의 근원이 다수라면 기존의 일원론적 근원 요소를 모두 포함하여 각각의 오류를 극복하고 장점만을 취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자연의 근본이 되는 기본적이고 영원한 원소는 흙, 물, 공기, 불이라고 주장하여 초기 사상인 일원론 요소를 모두 포함하여 받아들였다. 만물은 네 원소가 서로 혼합을 거쳐 생성되었다. 근원 요소로부터 만들어진 물질은 소멸할 수 있으나 네 원소 자체는 생성도 소멸도 되지 않는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변화에 대해서는 그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생성과 소멸이 없는 상태에서 물질의 변화가 조화로울 수 있도록 하여 물질의 총체는 변하지 않으며 혼합과 상호 교환만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종류가 다른 물질이 변하는 대신에 근원을 이루는 원소들의 혼합으로 자연의 물질이 구성되었다고 보았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 변화와 상충하지 않도록 조화시킨 결과였다.
그렇다면 네 원소가 혼합하면서 물질의 생성과 소멸이 일어나도록 하는 어떤 원인이 있어야 한다. 혼합은 어떤 힘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보았다. 힘으로 순환적 과정을 설명하여 어떻게 생성하고 소멸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였다. 엠페도클레스는 힘을 사랑과 미움 또는 조화와 불화로 표현했다. 오늘날 이 용어들은 물질에 쓰이지는 않으므로 물리적인 힘으로 생각하여 서로 대립되는 것을 끌어당기는, 밀치는 힘 정도로 해석하면 옳을 듯싶다. 원소들의 결합으로 대상의 생성에 사랑이 관여하고 대상의 소멸에 미움이 관여한다. 사랑과 미움의 힘은 주기적이고 반복적으로 작용하여 물질들의 생성과 소멸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물리적 힘이라고 하지만 사랑과 미움은 신화적 요소가 크므로 자연의 물질적 순환과정을 물리적으로 제대로 설명했다고 볼 수는 없다.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아낙사고라스 또한 다원론을 제시하여 선대 철학자들의 사상들을 결합하여 조화하려 노력하였다. 그의 생각은 존재가 생성과 소멸이 없이 영원불멸한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엠페도클레스와 궤를 같이한다. 아낙사고라스 또한 기본 물질의 혼합이 대상들을 형성하고 분리가 대상들을 소멸한다고 본다. 그러나 4 원소설은 부정하며 질적으로 전체와 같은 부분을 가지는 것들 모두를 궁극적이고 근원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물질 하나하나는 자체의 근원 요소가 있고 이를 씨앗이라 명명하였다. 그러므로 특정의 금속을 반으로 쪼갰다고 다른 금속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금속이 아닌 물질로 그 금속이 생겨났다고 볼 수 없다는 논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4 원소는 궁극적이 아니며 이것들은 질적으로 다른 많은 입자로 구성된 혼합물이다. 이처럼 혼합의 관점에서 엠페도클레스의 입장과 유사하나 원소로부터 사물이 형성되는 과정은 확연히 다르다.
엠페도클레스가 사랑과 미움(아마도 끌림과 밀치는 힘)이라는 물리적 힘으로 우주의 운동을 기술했지만, 아낙사고라스는 정신(또는 마음)의 원리를 적용했다. 누스(nous)라 불리는 정신은 모든 사물 중에서 가장 미세하고 순수하고 이 정신은 모든 것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누스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입자들이 상호작용하는 동기가 되는 힘의 근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누스는 유물론적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최초의 정신적인 원리이다. 원리는 장차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논리적인 이론의 구성에 영향을 끼친다. 그의 원리는 엠페도클레스의 사랑과 미움의 힘보다 더 근본적인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쩐지 그의 설명이 부실한 것처럼 여겨진다. 이유는 정신이라는 비감각적인 것의 사유를 언어로 표현하는 어려움에 부닥쳐 있기 때문이다.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의 다원론은 논리가 부족한 면이 있어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진행되었다. 우선 4 원소설은 질적인 변화에 대하여 양적으로 설명하는 논리가 부족하다. 힘으로서의 사랑과 미움은 비유적이므로 이에 대한 물리적인 해석이 좀 더 필요하다. 아낙사고라스의 누스는 힘을 정신으로 표현하여 원리(법칙)적 성격을 띠게 하여 어떤 법칙 아래 물질의 변환을 설명하려 했으나 여전히 정신이 무엇인지 불분명한 면이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 방편은 물질적인 관점인 기계론적으로 담론을 이끄는 것이다. 원자론자들이 그 일을 담당하였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는 자연의 근원 요소로서 무한하고 불가분적 단위를 상정하여 이를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란 뜻의 원자로 불렀다. 원자는 감각적으로는 지각되지 않지만, 물질의 특성에 맞게 크기와 모양과 견고함이 다르다. 예를 들어, 철은 원자 자체가 견고하고 원자들이 서로 고리로 연결되어 매우 딱딱하고, 물 원자는 부드럽고 미끄럽다. 이에 비해 소금 원자는 짠맛 때문에 날카롭고 뾰족하고, 공기 원자는 가볍고 빙빙 돌며 다른 모든 물질에 퍼져 있다. 무한한 원자들은 진공 안에서 운동한다. 원자들 간의 충돌로 인해 서로 다른 원자들이 서로 얽혀 원자의 집단을 형성하며 소용돌이가 만들어져 세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4 원소가 형성된다. 원자론에서는 운동의 근거가 되는 힘이 나타나지 않는다. 태초에 진공 속에 원자가 있어 이들은 자족적으로 영원한 운동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레우키포스 등의 원자론자들은 철저히 기계론적이다. 이 이슈는 왜 원자가 운동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으므로 후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다원론자는 파르메니데스 존재의 영향을 받았으나 위에서 언급되었다시피 조금씩 다르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는 불변하고 변화가 없다. 다원론자들은 불변성을 받아들여 요소론에 적용하였다. 그러나 데모크리토스는 존재는 생성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는 논증을 받아들이고 불변 입자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물체로 간주하여 변화를 설명했다. 불변성은 받아들이되 변화를 무시하지 않았다. 후일 플라톤은 불변을 영구히 존재하는 것이고 현실의 객관적 관념과 동일시하였고 파르메니데스가 구별한 이성과 감각의 세계를 중요시하였다. 이처럼 유물론자인 파르메니데스는 유물론적 사유의 다원론자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뿐만이 아니라 플라톤의 관념론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