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에 대한 사유는 사물의 존재는 반드시 변화를 거치므로 변화 자체에 존재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존재론이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과 무관한 정적 관점에서 어떤 것의 존재는 의미가 없다. 자연이라는 보편적 존재는 그것을 구성하는 수많은 개별적 존재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자연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개별 사물의 존재 또한 그 사물을 특징짓는 다양한 것으로부터 규정된다. 그의 아포리즘인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 또는 하나로부터 모든 것’은 크게는 자연의 존재, 작게는 개별 사물의 존재를 동적 관점에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엘레아학파의 파르메니데스는 헤라클레이토스와는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변화는 불가능하고 존재란 실재는 하나이고 불가분하고 균질하다고 하였다. 그의 생각은 이렇다. 만약 어떤 것이 생성된다면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는데 어떤 존재로부터 이거나 비존재로부터 일 것이다. 만약 존재로부터 생성된다면 이미 존재하는 것에서 만들어지므로 생성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만약 비존재로부터 어떤 것이 생성된다면 비존재는 이미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이는 모순이므로 비존재에서 존재가 나올 수는 없다. 무에서는 무가 나올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있고 비존재는 없다. 어떤 것은 존재로부터 생성되지도 않고 비존재로부터 생기지도 않는다. 즉,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다. 고로 존재는 생성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존재에 관해 최초의 추론 논증이다.
이제 존재에 관한 추론을 변화로 확장해보자. 어느 시점의 어느 지점에서 사물이 이동하여 변화를 일으킨다면 이동 전의 시점과 지점에 존재는 이미 없게 된다. 그러므로 변화란 무엇이 존재에서 비존재로 가는 경우이다. 그런데 앞의 추론에서 밝혔듯이 존재는 있고 비존재는 없다. 고로 변화는 없게 된다. 이번에는 변화에서 차이를 따져보자. 차이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존재는 없으므로 차이도 없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 밀레토스학자들의 견해에 적용해보자. 자연의 근원으로서 물이나 불 또는 아페이론 등은 세계의 구성 요소가 각각 근원 요소와 같지 않으면서 모든 것의 이면에 있는 실체로 간주할 수 있다. 고로 실체는 존재(실재)이다. 존재는 단순히 있을 뿐이고 하나(일자:一者)이고 불가분하고 균질하다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변화와 차이를 감각으로 지각한다. 파르메니데스는 감각적 지각에 의한 변화와 존재론의 상충을 감각을 이성과 구분함으로써 해결하려 한다.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세계와 감각으로 감지할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다. 또 다른 차원에서의 존재는 영원한 현실이자 불변이며 부패하지 않는 단일한 존재로서 오직 이성으로서만 도달할 수 있다. 존재인 일자는 유한하다는 데서 파르메니데스가 언급하는 존재가 실재이므로 공간적으로 유한하다. 존재는 물질적이다. 그래서 엘레아학파에게 존재는 유물론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존재가 오직 사유(이성)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관념론적이다. 그는 유물론자이지만 그의 사상은 관념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엘레아학파도 밀레토스 학자들처럼 세계를 관장하는 한 개의 원리를 발견하려 하였다. 그러나 보이는 세상은 분명히 다원적이고 변화무쌍하다. 그래서 만약 자연을 총괄하는 한 개의 원리가 있다면 원리를 세상에서 보이는 다양성과 변화와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관건이 된다. 즉, 하나와 다수의 문제이다. 피타고라스는 다수만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비해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수와 하나의 상이성 가운데서 동일성을 찾음으로 둘을 조화시키려 하였다. 엘레아학파는 다수를 부정하였다. 감각적으로 다수는 알 수 있으므로 변화는 반드시 있다. 그렇다고 하나 또한 부정하지는 못한다. 파르메니데스와 피타고라스의 일방적인 견해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둘을 모두 고려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이 합리적으로 여겨지기는 하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나와 다수, 안정과 변화 모두를 다 넣어서 조화롭게 논증하는 길만이 모순을 극복한다. 변화와 존재의 조화로운 조합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