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같은 커피 지옥
맛있는 커피 찾아 마시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당시 보광동의 헬 카페라는 곳의 커피가 그렇게 맛있다더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름 참 고약하다 싶어 처음엔 썩 내키지 않았지만 오직 커피를 향한 열정 하나로 바로 내달려 가보았다. 전혀 카페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언덕 위 대로변을 걸어 올라가며 실패를 예감할 때쯤 아담하고 어두컴컴해 보이는 상점이 보였다. 설마 여긴가 싶어 들여다본 내부는 카페명을 대변하듯 어둡고 좁아 보여 문 앞에서 불쑥 들어가지 못하고 주춤거리게 했다. 그래도 소문이 자자한 이곳까지 찾아온 김에 용기 내어 그곳의 문을 연순간 빨려 들어가듯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작은 공간을 가득 매우던 음악 때문이다. 도히려 그 공간이 아늑하고 포근하게 느껴질 만큼 스피커에서 (아마도 질 좋은) 흘러나오던 음악 선율과 어두웠던 실내 인테리어가 카페 이름과 완벽한 삼박자를 이루었다. 이름 참 잘 지었네! 좋은 지옥이다! 는 생각이 들어 냉큼 자리 잡고 앉았다.
조금 이른 시간에 간 터라 솜씨 좋기로 명성을 떨치던 카페의 주인들은 없었고 제3의 바리스타가 커피를 내려주었다. 헬의 커피는 지옥에서 받아마시는 커피는 이런 맛일까 싶게 아주아주 진하디 진했는데 그게 신기하게도 쓰거나 독하거나 등의 거북한 느낌이 아니었다. 무겁게 내리누르는 듯한 무게감에 도히려 차분해진달까. 압도된달까. 신맛도 고소한 맛도, 어쩌면 커피맛을 평할 때 말하는 다양한 맛 표현들이 딱히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 든다. 그냥 맛있다. 맛있어서 마시고 또 마시고 싶지만 상당히 진해 한잔만 마시고도 가슴이 펄떡거리곤 한다.
그 후 한두 번 더 보광동 본점을 찾아간 후로 더 자주 들리게 된 곳은 두 번째 지점인 동부이촌점이다. 새로 오픈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그곳은 자유로운 보히미안의 지옥 같던 보광동 지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는데 첫인상은 클래식하다 혹은 일본스럽다였다. 바에 앉자 각 잡힌 와이셔츠를 차려입은 바리스타가 물수건을 내어주며 주문을 받았는데 마치 일본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마스타를 만난 거 같았다. '카페 뤼미에르'라는 일본 영화엔 주인공이 오래된 커피집에 앉아 있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커피를 마시거나 우유를 주문하거나 하는 평범한 장면들일 뿐인데 보는 내내 주인공과 함께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한숨 돌리는 느낌이랄까. 그곳에선 마스타라 불리는 나이 지긋한 중년의 바리스타가 바 너머에서 주문을 받거나 짧은 대화를 나누는데, 마치 내가 그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새롭고 재밌었다.
마침 자리를 지키던 바리스타는 보광동 본점을 첫 방문했을 때 커피를 내어준 사람이라 참 반가워 인사를 나누었다. 아마도 그와 커피 인연이 있는가 보다. 기분 좋게 주문을 하고 마침 한가했던 바리스타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들의 포부는 이랬다. 한국의 커피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 보고 싶다고. 그래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있다고. 시간이 꽤 흘러 구체적인 것들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새로운 꿈을 꾸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하던 그 들뜬 표정이 참 인상 깊고 멋졌다.
언제 가나 한결같이 맛있는 헬 카페의 커피는 먼 곳으로 이사 온 후로는 마시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또 불쑥 가보아도 멋있는 마스타가 역시나 맛있는 커피를 내줄 테지. 이런 지옥이라면 언제라도 기꺼이 그 지옥문을 열어 제 발로 들어가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