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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동환 Jan 07. 2021

인간의 자존감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잘 만든 영화는 이야기하는 힘이 크다. 영화가 끝난 후 15분간 기립박수를 받은 영화가 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영화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내내 “왜 그러지?”라는 말을 되뇌었다.


‘다니엘 블레이크(Daniel Blake)’는 숙련된 목공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느 날 심장병이 생겨서 나라에서 주는 질병 복지수당을 받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심장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 질병 수당이 끊어진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아직 노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며, 병원에서도 자신은 아직 심장에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계속해서 질병 수당을 받아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하려고 담당자에게 전화를 하려고 하는데 오래 기다려도 통화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그는 사회복지센터를 찾아갔는데, 그곳에서는 먼저 상담 담당자가 전화를 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상담 담당자와 통화를 하게 해 주거나, 만나게 해달라고 했으나 상담 담당자가 먼저 연락을 하기 전에는 먼저 연락을 하거나 면담도 할 수 없는 것이 룰이라는 답을 받게 된다. 여기서 나의 첫 번째, “왜 그러지?”가 나왔다. 융통성이 없이 가이드라인 만을 따르라는 불합리한 안내에 답답함을 느끼게  것이다.


질병 수당이 끊기면서 다니엘 블레이크는 실업 수당을 받아야 했다. 실업 수당을 받기 위해서는 구직 활동을 해야 하고, 신청서를 온라인으로 작성해야 했다. 사회복지 센터에서는 누구도 다니엘 블레이크가 신청서를 쓰는 것을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컴맹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회복지센터가 아닌 다른 이웃들의 도움을 통해서 간신히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서 요구하는 이력서를 쓰는 수업을 듣고, 구직 활동을 위해서 이력서를 들고 사업장들을 돌며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그러자 어떤 업체에서 같이 일하면 좋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러자 다니엘 블레이크는 솔직하게 자신이 아직 심장의 문제가 있어서 일을 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상대방 회사에서는 일하지도 않을 사람이 이력서는 왜 냈냐고 짜증을 냈다. 여기서 나의 두 번째 “왜 그러지?”가 나왔다. 그렇다! 어차피 직장을 구해도 일을 하지 못할 병이 있는 사람에게 구직 활동을 하게 해야 실업수당을 준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단지 사회복지센터에서 요청하는 룰을 따라서 앵무새같이 같은 답변만 하는 직원의 설명에서 다니엘 블레이크는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답답함을 느꼈을 것이다.


성실하게 구직 활동을 하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다니엘 블레이크는 실업수당도 줄어들게 되고 점차 그의 생활은 궁핍 해졌다. 집의 대부분의 가구를 팔고, 그 돈으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어렵지만 사회복지센터에서 만난 케이티와 그의 두 자녀를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을 주었다. 목공의 실력을 발휘하여 집을 고쳐주기도 했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기도 했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다른 어려운 이웃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돕는 따듯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케이티는 사회복지센터의 약속 시간에 조금 늦게 도착해서 사회복지를 받지 못하게 된 사람이다. 여기서 또 나의 세 번째 “왜 그러지?”가 나왔다. 늦게 도착한 것은 케이티의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아이 둘이 있는 엄마가 살길이 없어서 사회복지센터를 찾아왔는데 약속시간이 늦어서 사회복지를 줄 수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가? 그것이 룰이라는 말이 또 한 번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사회복지센터에서 자신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대우를 하는 사람들에게 대항하며 그는 그냥 일어나 나갔다. 그는 밖에 나가서 사회복지센터의 벽면에 스프레이로 “I, Daniel Blake demand my appeal date before I starve and change the shite music on the phones."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내가 굶어 죽기 전에 나의 이의 제기 날짜를 잡아 주기 원하며, 내가 전화를 할 때마다 들리는 그 이상한 음악을 바꿀 것을 요청한다.”라고 글씨를 쓰고 1인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집에 돌아가게 된다.


결국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의를 제기한 질병수당의 재심사 요청이 사회복지 기관에서 받아들여져서 최종 심사를 받으러 갔다. 그곳에서 는 안내하는 사람이 잘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긴장을 한 상태에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그 자리를 떴다.  그 순간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뭔가 나쁜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감이 들었다. 영화를 볼 때 기분 나쁜 감은 왜 그렇게 잘 맞는 것일까?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장마비로 화장실에서 운명을 한다. 결국 그가 이의를 제기한 질병 수당을 받지도 못하고 그는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서 나는 사회복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사회복지는 어떤 이유로 인해서 직장을 잃었거나, 삶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최소의 사회 관계망이다. 물론 사회복지를 운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모럴 해저드를 조심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아닌데도 사회복지를 이용하여 수당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부정 수급을 막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필터를 두려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사회복지가 꼭 필요하지만 기다릴 수 없는 시급한 사람에게는 어떤 룰을 따지기 전에 먼저 기본적인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생각은 인간의 자존감에 대한 것이다. 사회복지를 제공하는 사람은 도움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이 사회복지기관에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인권과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행동은 피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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