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삶은 살만한 것일까라니. 전형적인 철학 문제구나.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먼저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할만한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언어적 의미의 확립이 필요하지. 할 만한 것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무엇을 할 만하다고 말하고 무엇을 할 만하지 않다고 말할까?
사람: 글쎄요. 아무래도 그런 질문은 여유가 있을 때 하는 질문 아닐까요? 다시 말하자면 어느 쪽이든 상관 없을 때 하는 질문 같은데요. 오늘 점심으로 라면이 먹을만 할까? 먹을만 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은 정말로 배가 고픈 사람이라면 하지 않잖아요. 장염에 걸린 사람도 하지 않을 거고요. 그러니까 '할 만할까?' 하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사실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사람들인거고, 선택할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염세주의자: 나는 지적인 놀이를 하자는게 아니야. 삶이 정말 살만한 것인지.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답이 필요하다는 말이야.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답이 없다는 것 쯤은 이미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어. 그런데도 왜인지 이런 질문에 여전히 마음이 동하는 것은 막을 수가 없어.
낙관주의자: 길을 가다가 아주 어린 아기를 본 적이 있습니까? 그 모습을 한 번 지켜보세요. 삶이 살만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여전히 드나요? 당신이 아주 망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아기를 앞에두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겁니다. 만약 당신이 보고 느끼고자 한다면, 아기 뿐만 아니라 세상 천지에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해줄 것들은 가득해요.
호인: 사람은 각자의 믿음대로 세상을 봅니다. 염세주의자에게는 의미 없는 세상이 펼쳐지고, 낙관주의자에게는 의미로 충만한 세상이 펼쳐지게 되어 있지요. 결국 염세주의자에게는 염세주의자의 말이 옳고, 낙관주의자에게는 낙관주의자의 말이 옳은 것이지요. 하지만 믿음에 따라 세상의 정의를 바꿀 수 있다면 과연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말입니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믿음은 버려 마땅할 믿음이에요. 생각만 해도 기운이 빠지고 입맛이 뚝떨어지고 소화불량이 일어날 것만 같은 그런 믿음은 버려 마땅한 믿음이죠.
염세주의자: 믿음이 그렇게 쉽게 버려지는 거였다면 그 많은 순교자와 종교전쟁은 뭐랍니까? 갈릴레이도 그냥 하느님이 거하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자기암시를 해버리면 됬었던 겁니까?
호인: 갈릴레이는 천동설을 이미 충분히 검증해본 사람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믿음에 반대되는 또 다른 믿음을 충분히 검증해 보았습니까? 그저 살아온대로 당신의 부모님이 당신의 사회가 당신의 기질이 흘러가는대로 당신의 믿음을 만들고 그것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당신은 염세주의에 반대되는 믿음을 가진 현명한 사람들 이상으로 그 믿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합니까?
낙관주의자: 저는 염세주의를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염세적인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염세주의를 버렸습니다. 마치 짜장면과 짬뽕 중에 짜장면을 선택해서 주문하듯이 말입니다. 무엇이 그리 심각하단 말입니까? 당신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있고, 그럼 더 나은 걸 선택하면 될 뿐입니다. 생각에 빠져 있으면 현실의 희로애락과 흥망성쇠가 보이지 않게 되고, 즐거움을 쫓는 방법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세상엔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이 막연하게 멀리서 원하기만 했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뿐일까요? 당신을 위해 오늘도 도살장에서 도축되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의미를 지키기 위해 어려움과 맞서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세상의 즐거움 뿐만 아니라 세상의 고난도 잊고 있는 것입니다.
호인: 세상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믿고 있습니까? 좋습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격리될 것이고 이내 세상 역시 당신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까? 그것도 좋습니다. 당신은 세상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세상에 역시 당신의 의미를 인정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사람: 의미가 있으면 크고 작은 목표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크고 작은 목표가 있을 때 좋고 나쁨이 있는 것이고, 좋음 뿐만 아니라 나쁨에서도 우리는 삶의 열정을 얻게 됩니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저는 몇 가지 단어가 떠오릅니다. 몰입, 열정, 통합, 생각의 부재. 아무런 목표도 없이 무언가에 몰입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에 열정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나 하나의 안위를 챙기기는 쉬운듯 하면서도 어느새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시야를 넓힐 수 밖에요. 내가 아닌 타인, 타인을 넘어 더 넓은 세상의 시야와 통합되어야 합니다. 시야가 통합되면 사사로운 생각이 사라집니다. 무언가에 몰입하고 있을 때 생각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생각이 사라진 곳에 온전한 느낌이 들어올 수 있게 됩니다.
호인: 삶이 살만한 것이냐? 그 대답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당신이 삶이 살만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 당신은 삶이 살만한 것이라는 생각에 걸맞게 행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반대로, 당신이 삶이 살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하다보면 당신은 삶이 살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생각하는 습관은 증명을 요구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되면 더 철저한 검증을 요구하죠. 그러나 때로는 검증되기 전에 먼저 행동하면 어느새 자연스럽게 납득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삶이라는 것은 확실하지 않은 것에 모든 것을 던져버릴 때만 그 진가를 보여주는 법입니다.
시인: 생각이라는 것은 갑옷과 무기, 성벽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들이 생겨난 것은 마치 필연 같은 것이었고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루종일 갑옷을 입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때로는 무기를 들고 다니는 것이 무기를 사용할 일을 만들어 위험을 초래하지는 않을까요? 갑옷과 무기, 성벽이 없어져야 한다거나, 없어질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무기를 좀 내려놓고 벽을 좀 허물어도 문제 없이 살 수 있다면, 그런 세상을 지향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사람: 성경에서 하느님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이천년전 무법지대나 다름없던 이스라엘의 사막이 아니라 이성이 왕권을 잡은 법치 자본주의 사회이므로 칼의 역할을 상당 부분 이성적 사고가 대신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죠. 세상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칼이 필요합니다. 칼 같은 생각. 어딘가 불편하고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한 그 무엇인가가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칼로 흥한자 칼로 망한다고. 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들어선 안 됩니다.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들어서도 안되지요. 이성이 삶의 궁극적 의미를 규정하려고 드는 것은 마치 여포가 칼 한 자루를 믿고 천하를 재패하려 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염세주의자: 생각이 내 삶을 이끌었고, 합리성과 이성적 당위가 곧 납득가능한 의미가 되는 것에 너무 익숙합니다.
호인: 의지만 있다면 변할 수 있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반대로 행동이 바뀌어도 생각이 바뀝니다. 그것이 지속되면 습관이 바뀌고 생활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어 어느새 믿음이 바뀌었다고 말하기 손색이 없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낙관주의자: 어찌됐든 선택일 뿐입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삶의 경로를 바꾸고 싶어하는 듯 보이니, 저는 제가 아는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바꾸고자 하면 바꿀 수 있다, 바꾼 삶은 나쁘지 않다는 사실 말입니다. 변화에도 기술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고 의미에도 지침으로 삼을만한 것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의지. 그리고 그에 따르는 믿음. 의지를 관철시키는 용기와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신념이 있다면 그런 것들은 부차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