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팅 포차

by 김동휘

아마 이 곳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것 같다. 이런 즐거움은 결국 나중에 필요한 모종의 즐거움의 기회를 잃어 버리게 만드는 즐거움. 말하자면, 결혼 초반의 현실적 문제와 서로의 뾰족한 부분과 공존하는 방법을 알아가는 과정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즐거움일테니까.


상상할 수 있는, 아니 적어도 내가 지금 누릴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누리면서 살거나. 모든 즐거움을 멀리하면서 살거나 결국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의 크기는 비슷하다는게 나의 믿음이다. 즐거움의 원천이 오감이든 정서든 호르몬이든 복합적인 무엇이든 결국 뭐든지 한계 효용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 같다. 나는 절대로 바나나를 먹으면서 태어나서 처음 바나나를 먹은 기영이처럼 기뻐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바나나가 아니라 무얼 먹어도 그렇게 기뻐할 수 없겠지.


일본의 한 스님은 80살이 넘도록 일생불범을 유지하며 덕 높은 스님으로 살았다. 스님이 죽기 전에 한 젊은 제자가 '스님은 일생불범의 이상적 삶을 살아오셨으니 행복하셨겠지요?' 라고 물었더니 스님은 '글쎄 행복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이 일생불범으로 살면서 휴 헤프너처럼 살 수는 없다. 누구나 자기 삶 밖에 살아볼 수 없다. 그러니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글쎄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스님은 분명히 삶에서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를 놓쳤다. 하지만 다른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는 끝까지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을 희망이라고 해야 할까, 믿음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둘 중 무엇이 더 좋은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건 그냥 기질 차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자의식이 부푼 사람들의 착각이고 사실은 주어진 대로 살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든 운명처럼 주어진 것이든 예전처럼 그것이 중요하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바나나를 먹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은 안타깝지만, 때로는 바나나를 맛보는 그 순간보다 바나나에 대한 기대가 인생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니까. 바나나는 그냥 바나나니까.




어린 시절부터 유흥부터 미식까지 즐길만큼 즐겼다는 A씨는 언젠가부터 더 이상 왠만한 것은 즐겁지 않게 됐다. 그래서 점점 더 큰 목표를 추구하다보니 어느새 꽤 성공한 기업가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추가로 많은 사람들이 사업을 하다가도 여자 때문에, 지나친 사욕 때문에 휘청거릴 때. 이미 겪을만큼 겪어본 그가 그런 문제에 면역이 있었다는 것이 혼란한 70년대 한국 사회 속에서 얼마나 큰 이점이 되었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럭저럭 잘생긴 외모에 좋은 집안과 학벌, 잠깐의 삐끗을 제외하고는 초창기부터 상승세만 이어온 커리어를 가진 B씨는 어린 시절부터 도덕 교과서를 머리에 이식한듯이 허튼 짓 한 번 안하고 평생을 살아왔다. 모르긴 해도 그런 신사적인 이미지가 그의 커리어에 조금은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아니, 그보다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그가 가졌던 세상에 대한 환상이 그가 야망을 가지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알 수 없다고 하기엔 뻔하긴 하지만...이성에게 무리해서 잘 보일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낄 수 있는 에너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늦바람이 무섭다고, 언젠가부터 평생 관심 없던 유흥에 점점 더 깊이 발을 들이고 심지어는 선후배가 모인 술자리에서도 손버릇이 안 좋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는데...


수 백명과의 성관계를 자랑하던, 성병 때문에 고자가 되어버린 C씨. 더 큰 쾌락을 도박에서 찾다가 강원도의 한 모텔에서 불귀의 객이 된 D씨.


어쩌면 어떤 선택이 옳다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나한테 이 순간 옳은 선택이 섬광처럼 잠깐 빛났다가 사라질 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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