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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잉 Nov 23. 2023

니체는 왜?

불교는 해탈에 대해서 말한다.


노자는 도에 대해서 말한다.


기독교는 천국에 대해서 말한다.


어떻게 하면 가장 즐겁게 살 수 있을까? 에 대해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곳을 파헤쳐서 나온 대답.


그걸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 것. 


그건 지식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외워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거기에 가까워지는 방법은 아마 미묘한 접근 방식들일거다.


그 정수 중 하나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는 것.


니체는 이를 멋있게 말했다. 운명을 사랑하라고. '이것이 삶인가? 그렇다면 한 번 더!' 라고 외치라고.


본인 머리에서 나온 생각일텐데. 니체는 운명을 사랑한 삶을 살았을까? 그렇다면 왜 그렇게 이 사람을 보라고 난리를 치고 끊임 없이 글을 썼을까.


운명을 정말 사랑한다면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좀 더 평온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른 하나는 시간에 대한 착각을 바로잡는 것.


과거와 미래 같은 것은 없다. 현재일 뿐이다. 


과거와 미래는 생각이 만드는 고통의 원천일 뿐.


생각을 버리고 현재를 산다면 만족은 있는 그대로의 만족일테고


고통은 지나가면 끝인 것일 뿐일텐데.


현재에 과거가 끼어들고 미래가 끼어들며 만족은 희미해지고 고통은 재생산된다.


니체는 또 멋있게 말했다. 영원회귀. 모든 것은 영원히 반복된다. 지금 이 순간. 그것은 영원이다. 지금의 이 순간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이 순간이 영원이다. 이 생의 과거와 미래는 영원한 이 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니체는 해탈에 도달하기 위한 미묘한 원리들을 직접 간파해냈다. 그런데 해탈한 사람처럼 살지 못했다. 오히려 그냥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보다 해탈에서 더 멀어 보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는 것 같다. 누구나 알고 있다. 해탈하는 방법을. 누구나 갖고 있다. 불성을.


포주 일로 외제차를 몇 십대 사모은 사람이 말한다. "많은 것을 가지는 건 좋죠. 그런데 그것보다 좋은 건 애초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거겠죠." 어쨌든 그는 여전히 돈을 더 모으려고 날뛰고 있다.


워커홀릭 직장인이 말한다. "저는 만족을 미루기 보다는 현재를 충실하게 살자는 주의입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서울에 집을 사기 위해 자신의 기분과 상관없이 밤낮 없이 일한다.


경전을 본다. 명언집을 본다. 시집을 본다. 감명을 받는다. 하지만 잠시 후 그런 건 읽은 적 없는 듯이 산다.


니체는 누구나 아는 것을 말했다. 니체만 그런 것이 아니다. 부처도 누구나 아는 것을 말했다. 노자도 누구나 아는 것을 말했다. 니체는 지성이 날카로워 그걸 자신의 언어로 꺼내놓을 수 있었다. 포주도 안다. 다만 그는 니체만큼 날카롭게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영원회귀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잡생각을 버리슈'라고 말한다. 노자는 지성이 무뎌서 못 꺼내놨을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노자는 안다.


눈썰미가 좋아서 자전거 타는 방법에 대해 백 가지 이론과 진행과정을 꺼내놓을 수 있다. 그게 니체다. 하지만 니체의 말을 듣는다고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건 아니다. 조금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오히려 너무 복잡하고 재미 없어 보여서 '이게 뭐야 싯팔' 하고 자전거를 때려칠 수도 있다. 생각이 많아지면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이 부처다. 부처를 보다보면 자전거 타는 법이 조금 감이 온다. 자전거를 타고 썡쌩 달리는 부처를 보면 나도 자전거를 타고 싶어진다. 


니체나, 나나, 포주나, 자전거 타는 법은 배워서 아는 게 아니다. 그냥 본능적인 움직임을 깨워서 타는 거다. 누구나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사람이다. 지금은 타지 못할 뿐이다. 


부처가 되는 법은 배워서 아는 게 아니다. 그냥 내 안의 불성을 알면 되는 거다. 누구나 부처다. 지금은 부처가 아닐 뿐이다. 


부처가 되는 1000가지 방법을 생각하는 것. 그것은 부처가 되는 길이 아니다. 편두통의 길이다. 두뇌 과부화의 길이다. 


지성적 이해보다는 순종과 믿음이. 생각보다는 관조가. 노보다는 예스가. 인생에 가깝다. 즐거움에 가깝다. 부처에 가깝다. 예수에 가깝다. 


부처는 너무 거창하고 그냥 인생의 좋은 것들은 모두 그런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1000가지 방법을 생각하는 것. 그것은 사랑하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쫓아내는 길이다. 즐거움도. 아름다움도.


그냥 즐거움이 찾아올 땐 찾아오겠거니. 아무 생각도 안하면 알아서 즐거워지겠거니. 즐겁지 않아도 그것도 괜찮겠거니. 그러면 즐거워질수도 있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생각이나 지식과는 별 관련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오히려 죽음에 가깝다. 즐거움과 활력 같은 것들과 대척점이다. 지식이 있거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존경을 받는다. 왜냐면 그런 사람은 자기를 죽여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꿀벌은 말벌이 침입하면 자기가 죽을 걸 알고도 가서 몸을 비벼댄다. 지식과 생각을 쌓는 사람은 말벌에 몸을 비비는 꿀벌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역전됐다. 자기를 희생해서 존경을 받는 게 아니라. 존경을 받으려고 지식을 쌓고 생각을 연마하면서 자살을 하려든다.   


외적이 철퇴를 휘두르면서 침입하면 누구나 도망가고 싶다. 본능적으로 장독대 뒤에 숨고 싶다. 누구보다 빠르게 산 속으로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생각이 끼어든다.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곡괭이라도 들고 외적 앞에 나선다. 그런게 생각이 존경 받는 이유 아닐까?


빗소리의 선율에 취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강수량과 홍수의 상관관계를 생각하는 사람. 그는 빗소리를 즐길 수 없다. 그는 생각과 지식에 빠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지식이 존경 받는 것 아닐까? 


그래서 생각과 지식은 희생이 아닐까? 요즘이야 개인의 영달을 위한 수단이지만. 원래는 그런게 아닐까? 그렇다면 요즘은 바뀌어야 한다. 지식을 많이 쌓았다고 하는 사람은 혼쭐을 내줘야 한다.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도 혼쭐을 내줘야 한다. 그 사람은 존경 받을만한 희생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자신을 죽이는 바보같은 방법으로 이기적인 목표를 쫓는 사람이다.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지성의 탑이 나름의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대부분은 혼쭐이 나야 할 것만 같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 생각을 하는 사람들 열 명을 만난다면 여덟 아홉 명은 혼쭐을 내줘도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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