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수정 및 편집 과정을 거쳐 2024년 2월에 출간된 다음 단행본 원고에 포함되었습니다: '버티는 힘, 언어의 힘' (신동일 저, 서울: 필로소픽)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2228266
“우리 쪽 사람이야?”
또 시작이죠. 꼰대가 사람 뽑는 전형적인 기준입니다. ‘우리 쪽 사람’은 꼰대가 속한 곳에 있던, 지금도 있는, 앞으로도 있을 사람이란 뜻일 겁니다. 예를 들면, 한국어교육 분야라면 그 대학에서, 그 학과에서, 특정한 분야에서 학부 전공으로 공부했거나 석사나 박사과정에서 누군가와 공부해야 합니다. 다른 분야에 있던/있는/있을 사람이 ‘우리’ 분야로 건너오거나 뭘 해보려고 한다 싶으면 무시하거나 경계합니다.
그나마 석사나 박사과정이라도 누군가와 공부해서 ‘우리’ 사람으로 새롭게 인정되면 다행이죠.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어느 학교, 어느 전공이 시작된 셈인데 10년이 흘러도, 20년이 흘러도, 뭘 그동안 하더라도 ‘그들’은 계속 ‘그들’이고 ‘우리 ’는 ‘우리’이어야 하죠.
제가 문헌으로 공부하곤 했던 니콜라스 로즈(Nikolas Rose) 박사 얘기를 한번 해 볼게요. 그는 세계적인 학자입니다. 초파리 유전학 연구로 유명 대학에 입학한 후 생물학을 공부했는데 재미가 없어서 동물행동학으로 전공을 바꾸었지만 그것도 신통치 않았어요. 그리고는 심리학을 복수전공하다가 아예 심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비정상’ 범주에 있던 아동을 위한 교육, 아동 학대에 관심이 생겼어요. 그러다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됩니다. 박사과정 때 알튀세(Louis Althusser)의 이데올로기론에 관심을 갖지만 논증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푸코(Michel Foucault)의 통치성 이론을 새롭게 탐구합니다. 다행히 통치성 연구는 괜찮았어요. 충분한 연구문헌을 축적하면서 보다 구체적인 경험연구로 이동하고 정신의학, 생명과학 현장에서 학제적 문헌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연구자로서 보면 참으로 거침없고도 멋진 삶의 궤적입니다. 학술적 성과만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경계를 계속 넘는 학제적 시도, 지적 호기심, 앎의 실천, ‘우리’ 사람 따지며 골목마다 높은 울타리를 쳐둔 국내 학계를 생각하면 정말 가슴 설레는 모습이죠.
국내 대학과 연구기관은 아직도 신임/경력 연구자나 교수를 채용할 때 ‘학부-석사-박사 동일 전공 우대’를 명시적으로 표기해요. 로즈 박사와 같은 사람을 들어오지 못하게 아예 선을 딱 그어두죠. 경계를 과감히 넘는 학제적 연구자에 관심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전혀) 없습니다. 학제적 연구자가 되려면 ‘우리 쪽 사람’이 먼저 되어야죠.
선발 공고에 명시되지 않는다고 해도 입학이나 입사 서류를 검토하고 면접을 할 때 학부-대학원에서 동일한 이름으로 기입된 전공이 너무나 손쉽게 선호되죠. 당신도 자주 경험했었죠. 학부 전공과 다른 대학원 진학생이었으니 재학 기간 내내, 아니 어쩌면 졸업 이후조차 불이익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참 마음 아프고 미안합니다. 나로서는 어쩔 수도 없는 참 나쁜 관행입니다.
그런데 제도권에 진입한 나와 같은 연구자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아요. 바깥을 넘보며 학제적 연구를 기획하긴 쉽지 않아요. 특히 ‘우리 사람’이 아니라면 더 그렇습니다. 박사가 되고 관련 연구문헌을 출간하기도 하지만 ‘우리 쪽 사람’이 아닌 사람이란 주홍글씨는 늘 이마에 붙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요령껏 그걸 아예 숨기도 하죠.
학부 편입이든, 대학원 진학이든, 석사/박사 취득 후 입사든, 학부 때부터 일관적으로 동일 전공 지원자를 찾는 관행은 학술적 활동, 연구자로서의 성장에 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렇기도 해요. 무지에서 나온 관행이죠. 연구자와 연구활동에 관한 명시적인 차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런 공고를 대놓고 내는 것과 같은 차별적 관행을 당신도 나도 호랑이 눈으로 감시해야 합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전공을 선택하는 건 대개 만 18세 전후입니다. 온전할 수만 없었던 틴에이저일 때 정해진 대학과 학부 전공으로 평생의 딱지를 붙이고 변화의 기회를 제한하는 기관이 있나요? 당신과 나는 그곳을 고발해야 합니다. 거긴 새로운 배움과 또 다른 기회를 허락하는 건 차치하고 구조화된 차별을 방치하고 조장하는 곳입니다.
청년과 장년을 지나며 열의를 쏟은 연구활동의 과정과 결과물에 비중을 두지 않는 곳. 인상적인 판단으로 우리 편인지 아닌지 늘 관심을 두는 곳. 명문대학이나 모교 출신만 선호하는 곳. 그런 곳은 한 줌의 기득권력으로 성별, 나이, 출신대학, 세부 전공 등으로 구분되지 않을 것을 마음껏 찢어 버리고는 차별 가득한 세상을 앞장서서 만드는 곳입니다.
골목대장 권력자들은 이질적이고 학제적 연구자들이 유입되면서 교육연구의 새로운 지형이 만들어진다고 상상도 하지 못하죠. 학자로서 연구자로서 자존감이 낮은 그들만의 집합체엔 자신과 다른 앎의 궤적을 경험하고 준비할 당신과 같은 (예비)학자에 관심이 없어요. 당신이 앞으로 자랑스런 동료이자 자산이 될 것으로는 기대하지도 않아요.
그런 곳은 대개 순수함을 강조하는 곳입니다. 획일적이고 고정된 이데올로기가 만연한 곳입니다. 익숙한 보상체계로부터 횡단적으로 재구성된 지식은 허락하지 않아요. 새로운 건 ‘우리 사람’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단 경계하고 배제하고 폄하합니다.
동일성의 기준이 중요하기 때문에 교수들은 서로 비슷해야 하고, 학생도 모두 비슷해야 합니다. 학교 밖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국회의원들도 비슷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20대 여성 국회의원이 분홍색 원피스를 국회에 입고 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죠. 아니, 아무것도 모르는 20대 여성은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대학 졸업 후에 지적 호기심이나 사회적 필요를 확인하고 새로운 공부를 할 수도 있죠. 학부 편입이든 대학원 공부든 각자 서 있는 위치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죠. 그런데도 이상화된 특정 집단과 비교되면서 새로운 출발과 분투가 억울하게 차별받는다면, 거기는 차이와 다양성의 역동적인 가치를 무시하는 곳입니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삶의 궤적이나 앎의 출발점을 인정하지 않는 반자유적인 공간입니다. 이미 선택된 진골 제자를 위해 다수의 학생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는 사실에 진골 출신이 아닌 당신과 나는 함께 분노해야 합니다.
대학원에서 논문지도를 할 때 명문대학이나 모교 출신 좋아하는 교수는 지도학생도 배정받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출발선 한참 뒤에서 시합을 시작해야만 했던 당신의 분투가 안타깝고 그래서 당신을 더욱 응원합니다.
당신은 과연 사회적 차별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공부를 하고 싶어서 한다지만 불공정한 사회구조가 깊어지면 최선을 다한 당신은 무력감으로 고통받을 수 있어요. 당신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경험한 기억을 놓고 새삼 상처받을 수 있어요. 아버지를 원망하고 그때 친구들 탓을 할 수도 있어요.
버티면서 싸우더라도 영리하게 대처합시다. 성별, 나이, 출신학교, 전공 등으로 차별받는 사람은 당신뿐만 아닙니다. 학교에 있는 나도 참 답답합니다. 학교가 차별이 구조화되고 있다면 도대체 젊은 학생들에게 어떻게 열심히 해보자고 권면할 수 있을까요?
열심히 하면 뭐하나요? 더 깊은 차별의 기억만 쌓일텐데요. 우리가 힘을 합쳐 자꾸 목소리를 냅시다. 서류만으로, 면접만으로, 지금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람 뽑고 보상하는 문화를 갖자고 자꾸 말을 걸어봅시다. 심사자료 공정하게 제출하게 하고 심사자는 엄격하게 검토하자고 요구합시다. 포기하면 안되요. 인터넷 공간에 카페라도 만들고 변호사를 찾고 그렇게 함께 더 싸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