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동일 Jan 18. 2024

집으로 가는 길 13

현재 영하 20도, '봄밤'에 관해서 

1. 시카고 지역이 며칠째 영하 20도 날씨입니다. 한 학기만에 처음으로 ‘아, 내가 지금 미국에 있구나’란 생각이 듭니다. 이곳에서 특별한 건 없었지만, 귀국해서 분주하고도 치밀한 서울 생활로 돌아간다 생각하니.. 적막한 지금 시간이 그리울 것도 같습니다. 


2. 외풍을 피해 담요를 덮고 신학, 미학, 철학 책을 하나씩 읽었는데 이러다가 한국서 가져온 10여권의 책을 모두 읽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논증 가득한 글만 자꾸 보면 책 바보가 될 수 있는데.. 다행히 넷플릭스로 k-드라마를 하나 보았습니다.


3. 아주 가끔 영화나 볼 뿐이라 넷플릭스 멤버쉽을 중단했는데 그전에 한국 드라마를 우연히 보게 된 것이 로맨스 장르 ‘A Spring Night (’봄밤‘)’이었네요.  


4. 넷플릭스 드라마는 짧다고 들은 것 같은데.. 끝날 듯 말 듯 무려 16화였습니다. (10-12화 길이면 충분했을 듯..) 중간에 빠르게 돌린 장면도 많았지만.. 그래도 달달한 러브스토리이기만 했다면 에피소드 16개를 이틀 내내 보지 못했을 겁니다. 


5. 제가 사는 곳과 닮은 친밀한 풍경도 좋았고.. 주변 캐릭터들도 좋았어요. 우정과 자매애를 나누는 장면들.. 사회적 약자에게 손을 내미는 자들의 표정과 대사가 좋았습니다. 마치 제 페친들 모습을 보는 듯한.. 프랑스에서 공부 관두고 와서 옳은 말만 골라서 하는 백수인 셋째 딸이 저의 최애 캐릭터였습니다. 


6.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마지막 에피소드인가.. 세 자매가 (권력관계로부터 비루한 삶을 살았지만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첫째 언니의 고통을 놓고 아무 말도 없이 서로 다가와서 옆에서 그저 안아주며 울어줄 때였습니다.


7. 온전한 사랑을 나눌 주체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런 사랑을 받는 객체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바우만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사랑의 주체이며 객체이니 관계의 갈등과 모순을 피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투하며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관계를 붙들기 원합니다. 


8. 자리를 지키며, 경청하고, 버티며, 같이 울어주며, 그리고 웃을 수 있을 때 함께 웃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랑.. 저는 허다한 무리의 인정보다 그런 사랑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지킬 것입니다. 


9. 제가 좋아하는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랑의 증거는 하나뿐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 모두의 활기와 강인함, 그것만이 사랑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열매이다.”


10. 페친께서도 행여나 감정 흡혈귀로부터 고통받는다면, 부당한 권력자로부터 배제되고 있다면, 눈치를 살피며 억지 감정으로 그와의 관계를 온전하게 정리하지 못한다면, 별것도 아닌 듯한 일상의 풍경과 대중 서사로부터도 용기와 사랑과 혜안을 얻으시기를.. 외로움을 덮어준 얄팍한 감정언어의 떡고물을 휴지통에 버리시고 봄이 오기 전에 독립을 선택하시기를..


11. 겨울은 그런 결단을 하면서 희망을 품기엔 최고의 계절입니다.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봄은 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