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미안함과 사랑이 담긴 찌개
어렸을 적부터 아빠가 해주시던 요리가 있다. 그 이름은 라면찌개. 나는 라면찌개라는 음식이 원래 있는 요리인 줄 알았다. 적어도 지금 남자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정말 그랬다. 그런데 작년 여름, 남자친구와 대화를 하는 도중 그 음식은 우리 아빠만의 음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늘 아침은 라면찌개 먹었어. 아빠가 해주셨어!” 내가 신나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남자친구는 어리둥절해 했다.
“라면찌개가 뭐야? 처음 들어봐. 부대찌개 아니야?”
오빠의 그 한 마디에 조금 놀랐던 기억이 난다. 라면찌개를 어떻게 모르지? 라는 생각이 아주 짧게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초등학생 때부터 먹었던 음식이라 당연히 누구나 아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라면과 찌개는 한국인에게 얼마나 익숙하고 당연한 음식인가! 그 둘을 조합해 놓은 단어는 분명 있겠지 싶었던 거다.
라면찌개를 만들기는 정말 쉽다. 사실은 거의 라면을 대용량으로 끓이는 거랑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또 막상 먹어보면 그냥 끓여먹는 라면맛은 아니다. 어쩌면 나만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에겐 그냥 라면은 아니었다. 김치찌개를 끓이는 큰 냄비에 물을 끓이고 김치를 썰어넣고, 라면과 라면스프를 넣으면 끝이다. 그리고 꼭 흰쌀밥과 먹으면 된다. 정말 그게 다다. 레시피만 보면 그냥 라면 혹은 김치찌개다. 가끔 아빠가 햄을 넣어주실 때도 있었는데 그땐 부대찌개 끓이는 것과 다르지 않아보인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건 나한텐 그 음식이, 라면찌개가, 김치찌개와 부대찌개 그 둘과는 항상 먹을때마다 다른 맛이 난다는 거다. 단순한게 말하자면, 더 맛있다. 왠지 특별하다. 평일 내내 일하셔서 우리에게 밥을 차려주실 수 없는 아빠가 주말, 토요일 아침에 해주는 음식이라 그런지 동생과 나는 그걸 특별하게 느낀 듯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라면찌개가 나에게 특별하고 유난히 맛있는 이유는, 아빠의 사랑이 담긴 음식이기 때문인 것 같다. IMF 이후 우리아빠는 힘든 시기를 겪었고 그에 따라 가정주부이시던 엄마도 일을 나가게 되었다. 나와 남동생은 그 시절 초등학생이었다. 그때부터 아빠가 라면찌개를 끓여주셨던 것 같다. 평일에 나와 동생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에서 반겨주는 건 그때 당시 키우던 ‘행복이’라는 귀여운 강아지뿐이었고, 동생과 난 엄마가 전날 해놓은 반찬을 꺼내 먹었다. 토요일에도 일을 하던 엄마를 대신해 아빠가 토요일 아침마다 해주셨던 음식이 바로 라면찌개였다.
나와 동생도 그 시절 부모님이 힘든 상황인 건 알고 있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누리던 것들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고, 웃음기가 사라진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빠르게 철이 들어가고 있었다. 어렸지만 슬픔과 삶의 무게가 무엇인지 그때 당시 젊었던(심지어 엄마는 30대였다. 지금 나에게는 언니라고 부를 정도의 나이뿐인.) 부모님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항상 같이 보내던 주말 하루의 풍경에 엄마가 사라지고, 아빠는 배고프다며 일어난 우리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그 힘든 시기에 좋은 음식을 해줄 수 없던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나중에 얘기했던 것이지만 우리 엄마도 정말 슬펐다고 한다. 성장기인 우리에게 더 좋은 음식을 못 먹였다는 사실이 그토록 후회로 남는다고.
하지만 우린 그때 어려서 많은 걸 알지 못했다. 부모님은 후회하실 수 있지만, 동생과 나에게 라면찌개는 너무 소중하고 특별한 추억으로 남았다. 신기하게도 우리 집 사정이 나아지면서 라면찌개를 먹는 빈도수가 줄긴 했지만, 30대를 코 앞에 둔 나와 20대 후반의 한 지점에 서있는 동생은 여전히 가끔 아빠께 라면찌개를 해달라고 한다. 우리에게 그 음식은 어렸던 그 시절 아빠가 우리를 위해 해줬던 미안함과 사랑이 담긴 음식이었기에 아직도 소중하다. 그냥 라면일 수 있지만, 우리가 훗날 먹게 되면 반드시 아빠를 떠올릴 음식일 테니까.
이번주 토요일엔 아빠께 라면찌개를 해달라고 해야겠다. 40대의 아빠든 60대의 아빠든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은 한결같이 들어있는 그 음식을 오랜만에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