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녀를 만나고 온 날
<토지> 박경리 그녀를 사랑합니다.
1. 2008년 5월 5일, 박경리 그녀가 떠나던 날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결국 그녀는 갔단다. 얼마 전 박경리님이 의식불명이라는 소리를 듣고 나는 다시 <토지>를 읽기 시작했다. 적어도 내가 이 책을 마무리 할 때까지는 살아 있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담았는데, 결국 이렇게 별세 했다. 가슴이 아프다. 정말 내 어머니가, 내 할머니가 저 세상으로 간 것 같은 이 허전함은 무엇일까?
20대, 내 인생의 암울함을 보냈던 그 시절, 내 유일한 낙은 책읽기였는데 그 책 중에서 '토지'는 내게 으뜸이었다. 세로판 책을 보며 가로판 책을 도서관 가서 빌려보면 좋겠다 하던 중, 후배가 삼성출판사 전집을 구입했다. 워낙 토지, 토지 하던 중이라 책 주인보다 내가 먼저 읽기를 마무리했다. ‘최치수가 죽었다. 길상이가 떠났다’ 며 함께 공유했던 그런 토지였다. 오늘 박경리 작가의 별세 소식에 후배는 또 어떤 가슴아림을 할까.
다시 읽기 시작한 <토지>를 모두 마무리 할 때까지라도 살아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했다.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지만 그래도 내 안에서 내 어머니로, 내 지주로 계셨던 그녀의 명복을 빈다. 장모의 주검 앞에 시인 김지하는 어떤 글을 내놓을까? 20대 가슴앓이는 여전한데 박경리 선생님은 이렇게 가시는구나. 그녀의 작품은 오래오래 기억되리라.
2. 2008년 4월 25일, 박경리 그녀가 의식불명이라고 하던 날
박경리 선생님이 의식불명이란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인데도 가슴이 뜨겁다. 내 20대를 온전히 지탱하게 해 주었던 원천적인 힘, 박경리 선생님.
중학교 2학년 때, 읽어야 되는 부채감과 독서량의 성취감을 위해서 무조건 읽었던 <토지>였다. 그 후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4번을 읽었다. 한 번은 최서희의 사랑에 가슴 아파하고, 또 한 번은 김길상의 사랑에 애간장을 녹이고, 우리네 역사 앞에 가슴을 저미고, 그 많은 사람들한(恨)에 뜨거운 울음을 울며 내 나이듦과 함께 토지는 그렇게 내 곁에서 서성거렸다. 정체성 혼란을 겪을 때, 고비고비 힘들어서 허걱허걱할 때 언제나 찬란한 응원가가 되어 준 것은 <토지>였다. 보약 한 첩 이었고, 내 친구였다. 토지는.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던 토지, 연기자 김혜숙에서 최수지로 다시 김현주로 변모 하면서 시대 흐름에 따라서 조금씩 생각하고 추구하는 바가 달랐던 최서희를 보면서 나는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희망했을까.
가슴이 아프다. 내 할머니의 병간호를 옆에서 못 하고 있는 불효를 하는 것 마냥 마음이 쓰리다. 그리고 내 에너지가 스멀스멀 빠져 나가는 것 같은 허탈감이 밀려온다. 바람 부는 이 봄날 하동 평사리는 어떤 색깔로 우리들 봄을 맞이하고 보내고 있을까? 섬진강 자락 하동을 다녀오면 내 안의 우울이 날아갈까? 그냥 박경리 선생님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만으로도 이렇게 내가 흐느적거리는데 다른 나쁜 소식이 들려오면 나는 또 얼마나 무너질까?
3. 2018년 6월, 원주에서 다시 그녀를 보던 날
원주를 다녀왔다. 오로지 박경리를 느끼기 위해서. 원주 거기는 박경리 문학공원과 박경리 문화관으로, 서성이는 혹은 아련한 문학생을 관광객으로 맞고 있었다. 박경리 문학공원은 원주도심에서 관광객을 맞이하고, 박경리 문화관은 도심에서 조금 비켜간 곳에서 사람을 맞이한다. 바야흐로 원주는 박경리 작가를 중심으로 문화관광을 만들어 둔 모양새이다. 문회관광이든 뭐든 박경리 작가가, 토지가 이렇게 기억되고 있음에 나는 그저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다.
통영에서 만난 박경리는 젊은 집필가의 여러 일상들과 진주여고 중심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었고. 원주는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2층 양옥집을 중심으로 노년의 일상을 담고 있었다. 글을 쓰고, 밭에서 노동을 했다는 기록과 함께 그녀가 쓴 원고지와 호미와 그리고 이런저런 공예품들. 글을 쓰고 남는 시간에는 밭에서 일을 했다는 그 소소한 일상에서 살아있음에 대한 생명을 읽었으니, 그저 숙연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살면 저 웅장한 대서사시를 쓸 수 있을까, 하는.
동행한 지인들에게 <토지> 의 인물관계도를 마구 풀어서 이야기 했더니 정말 네 번, 다섯 번 읽었는 것이 맞구나, 하면서 새삼 내 읽기의 편집증에 놀라와 했다. <토지>는 아직도 내 안에서 서성이고 있다.
왜 <토지>에 그렇게 열중 했느냐고? 그거 소설로 일단 재미있다. 인물 구성 하나하나에 얽히고 설키고 한 그들의 인생사가 묘하게 재미있고, 묘하게 공감된다. 그게 작가의 기본적인 힘 아니겠나. 그러면서 자기계발서 같은 동기부여의 힘이 있고, 또 역사가 있고, 또 관계를 풀어내는 심리학이 있다. 유시민 작가는 글을 잘 쓰고 싶으면 <토지>를 읽어라, 했다. 공감한다. 관계학을 잘 하는 소통을 하려면 또 <토지>가 실마리를 준다. 그래서 더 권하고 싶다.
4. 2018년. 7. 여름 어느 날
다시 <토지>를 읽기 시작했다. 보약 한 첩 재탕해서 먹는 기분으로. <토지> 읽기를 마무리 할 즈음에 나는 또 한 뼘쯤 더 성장해 있을 것이다, 라고 믿어본다.
사랑합니다, 박경리 선생님.
거기 하늘에서 잘 지내고 계시죠? 하늘에서의 편안함을 빕니다.
-교육.문화기획자/김향숙-
---- 여전히 박경리 쌤은 나에게는 보약 한 첩이다.
2018년, 토마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