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끊어졌다. 여러모로 끊어졌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14-
14화. '끊어졌다. 여러모로 끊어졌다.'
3부.
14.
"하아... 그게 그렇게... 됐나요..."
"네. 그렇게 됐네요. 마음 좋지 않으시겠지만, 이계성 환자분 시신을 유가족이 인수 하실지 유가족 분들한테 한번 확인 부탁드릴게요."
"이전에 통화를 해본 적이 있는데. 아마 인수를 안 하실 거예요."
"그래도 일단 절차상 해야 하는 과정이니까. 주민센터에서도 확인을 해주세요. 저희도 나름대로 규정에 맞게 절차를 진행할게요."
"알겠습니다. 한번 해볼게요."
전화를 끊는다. 월세 계약, 악성 민원, 똥궁빌라, 시끄러운 사람들. 다 싫다. 그래도 이미 일을 벌어졌고. 내가 처리를 해야 한다. 내가 여기서 퍼져버리면 진짜 며칠은 못 움직일 것 같다. 스스로 고통을 인식하지 못할 만큼 바빠야 할 시기가 있기도 하니까. 이계성 할머니 자녀분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수화기를 든다. 이계성 할머니 상담기록에 적어둔 자녀의 전화번호를 꾹 꾹 누른다. 전화기가 고장났나 다이얼이 너무 뻑뻑하고 무겁다. 온 힘을 다해 다이얼을 누른다. 많은 게 무겁다. 전화가 연결됐다.
"안녕하세요. 강병1동 주민센터 주무관 강동노입니다. 이계성 할머니 자녀분 맞으실까요?"
"네."
"안녕하세요. 이전에 연락드렸던 공무원입니다. 연락드린 게 다름이 아니라."
"제가 그때 저한테 연락하지 마시라고..."
"이계성 할머님께서 어제 돌아가셨습니다."
"아... 네..."
가끔 다른 문장이 섞이지 않은 "네."라는 답변은 안심이 되기도 한다. 더 이상 달라질 게 없는, 이제 끝날 게 끝났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락드린 게, 유가족분들이 장례 절차를 인수하실지 여부를 여쭤야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침묵이 흐른다. 한 사람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몇 초의 침묵이다. 애도일지도, 짜증일지도, 무신경일지도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이 침묵은 특별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아니요. 원치 않아요. 전화 주신 공무원분 피해 안 가게 저도 협조할 테니. 인수 안 하는 걸로 해주세요. 보내야 하는 서류 같은 거 있으면 말씀 주세요. 그럼 끊겠습니다."
끊어졌다. 여러모로 끊어졌다. 전화가 끊어진 후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럴 수가 없다. 유야무야 일을 하는 척한다. 모니터를 보고. 점심을 사료 마냥 꾸역꾸역 쑤셔 넣는다. 오후에 병원 측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병원 측에 이계성 할머니 유가족이 장례 인수 거부 의사를 명시적으로 표명했음을 전달했다. 병원 원무과 직원도 일단은 알겠다고 했으며, 자신들도 관련 규정에 따라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전화는 끊어졌고. 각자의 절차가 진행되었다. 그렇게 이계성 할머니라는 하나의 존재가 끝났다.
다시 일을 하는 척을 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 모니터가 화면보호기로 전환되면 마우스만 클릭해서 화면만 정상으로 돌린다. 수진이는 나를 걱정하는 눈치다. 수진이는 나한테 따로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나의 내선전화를 대신 받아주었다. 오후 6시. 도망치듯 퇴근한다. 집까지 전속력으로 뛰어갔고, 도착해서는 또 누런색의 양주를 마신다. 역시 맛은 없다. 술기운이 올라와서인지 천장이 빙빙 돈다. 세상이 돌았다. 나도 돌았다.
강동노라는 전기장치의 전원을 내리기 위해 잠을 자려 했지만 잠이 오지는 않는다. 이계성 할머니의 노트가 떠오른다. 이계성 할머니 일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 답답하다. 이계성 할머니는 나에게 공책 전달이라는 미션을 왜 명령한 걸까. 마지막에 그 공책에 뭘 적어서 자녀에게 주려 했을까. 이제 상관없으려나. 따지면 쉬운 일이다. 내일 출근해서 복지정책과에 이계성 할머니 사망 사건을 전달한 뒤, 박 여사에게도 이계성 할머니의 죽음을 알리면 된다. 그럼 이계성은 내 손을 떠난다. 그 이후 절차는 나도 잘은 모른다. 그동안 비슷한 일들이 있었지만, 누군가의 죽음 이후의 이야기에 마음을 써본 적이 없다.
언제나 컴퓨터 파일 지우기처럼 내 뇌 속에서 사건들을 억지로라도 지워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으니까. 이계성 할머니 사건도 그렇게 내 뇌에서 삭제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문과 출신인 나는 해석 못할 '사용 중인 파일이기에 삭제할 수 없다.'는 안내창만 뜬다. 고등학교 때 수학을 열심히 했어야 한다. 그럼 이과에 가서 이 더러운 꼴들은 안 봤을 텐데. 그렇게 이계성 할머니의 사건은 내 뇌에서 지우기 버튼이 안 눌리는 고장 난 파일이 됐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모든 게 다 끝났으면 좋겠다. 그래. 그냥 잊자. 이계성 할머니 사건이 내 일상을 너무 망가트렸다. 마음을 편히 갖자. 이계성 할머니 사건은 그냥 끝난 거다. 내가 더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이계성이라는 악성 민원인이 나를 괴롭힐 일도 이제는 없다. 이계성 할머니의 부탁은 나만 아는 일이다. 그냥 이계성 할머니의 공책만 불태워 버리면 된다. 이계성 할머니의 노트를 가방에서 꺼낸다. 이 공책만 찢어버리면 된다. 이 공책이 대체 뭐길래 천하의 이계성 할머니가 갑자기 나에게 부탁까지 했을까. 궁금하다. 더럽게 궁금하다. 공책을 펼쳐서 찢으면 더 쉽게 찢을 수 있다는 핑계를 나에게 제시한다. 누군가의 공책을 열어 볼 좋은 핑계다.
이계성 할머니의 공책을 펼친다. 공책의 상태는 생각보다 좋았다. 이계성 할머니가 공책을 자주 펼쳐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공책의 종이들은 먼지 한 톨 얹어져 있지 않고 깨끗하다. 공책의 첫 장에 기재된 내용은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XXX-XX. 102호.'라는 뜬금없는 주소였다. 종이를 한 장 더 넘긴다. 공책의 첫 장 뒷면에는 삐뚤빼뚤, 그러나 꾹꾹 눌러쓴 글씨로 써진 짧은 일기가 있었다.
19XX년 4월 2일 목요일. 날씨 흐림.
엄마랑 약속한 날.
엄마랑 약속했다. 엄마를 보고 싶으면, 할머니한테는 비밀로 하고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XXX-XX. 102호로 놀러 가면 된다. 102호에 엄마가 없으면 그냥 집에서 혼자 놀다 가도 된다.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을 이 공주 공책에 써서 102호 우편함에 넣어놓으면 된다. 이제 엄마랑 놀 수 있어서 좋다. 엄마랑 계속 놀 수 있으면 좋겠다. 근데 엄마가 나한테 "지연아. 할머니나 아버지한테 이건 비밀이야. 우리만의 비밀!"이라고 했다. 비밀은 친한 친구끼리 만드는 건데, 엄마와 비밀을 만들어서 기분이 좋다.
다음 몇 장을 더 읽어보니 공책의 주인으로 보이는 아이가 쓴 잡담 비슷한 일기나, 엄마로 추정되는 사람과 주고받은 공책 편지들이 있었다. 한 발자국 더 내딛으면 많은 걸 알게 될 거란 직감이 든다. 하지만 공책을 덮는다. 누군가의 일기나 편지를 훔쳐보는 건 내 성미에 안 맞는다. 무엇보다 이계성 할머니의 일들을 더 이상 나한테 묻히기 싫다. 그러기에는 내 삶도 너무 벅차다. 내일 출근하면 종이 파쇄기로 이 공책부터 없애야겠다.
공책을 다시 가방에 넣고 다시 잠을 청한다. 잠을 자기 위해 수많은 망상을 해보지만, 자꾸 이계성 할머니 공책의 존재만이 내 머릿속에 맴돈다. 역시 이계성 할머니와 엮이는 게 아니었다. 이 망할 인간은 죽어서도 날 괴롭히는구나. 아니다. 죽었으니 더 본격적으로 괴롭히려나. 이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징그럽다. 이계성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파일을 강제로라도 삭제하고 싶다. 어쩌면 이계성 할머니의 마지막 부탁인 공책 전달 미션을 해낸다면, '작업 진행 중'인 이계성이라는 파일을 '작업완료'로 변경되어 삭제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천장을 보며 외마디 단말마가 튀어나온다.
“내가 진짜 미쳐 가는구나.”
내가 자꾸 생각이라는 걸 하니까 이계성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거다. 며칠만 뭉갠다면 언제나처럼 이계성은 그냥 나에게도, 세상에도 존재하지 않게 될 거다. 양주를 한 잔 더 마시고 기절 하자. 오늘만큼은 나를 좀 죽일 필요가 있다.
침대에서 일어나 양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잔을 물에 헹군다. 아니. 근데 대체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XXX-XX. 102호'에 누가 살고 있을까. 그 사람은 이계성 할머니와 어떤 사이일까. 그리고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XXX-XX. 102호... 지연...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시감이 확신으로 바뀌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사동이면 이계성 할머니 자가 주택 주소잖아. 지연이면, 이계성 딸 이름이고.'
옷을 갈아입고 외투 지퍼를 채운다. 지퍼가 잘 채워지지 않는다. 신발을 신는다. 운동화 뒷축을 아무리 짓눌러도 발꿈치가 잘 안 들어간다. 구둣주걱을 진작에 샀어야 했는데 뭐가 아까워서 지금 이러고 있을까. 신발을 신는 데 성공하고 현관문 앞에 선다.
'지금 나 뭐 하는 거지?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지? 지금 나는 뭘 하려는 거지?'
이계성이라는 사건이 그냥 찝찝하기 때문일까. 숙면을 위해서라도 계속 떠오르는 이계성이라는 존재를 지워야 하기 때문일까. 이계성 할머니의 공책은 불태워 버리든, 찢어서 세절기에 갈아버리면 다 끝날 일이다. 근데. 그럴 수가 없다. 이계성 할머니의 일을 끝내야만 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래도 확신이 든다. 살다 보면 근거는 없는데, 묘하게 어떤 의심도 들지 않는 확신이 들 때가 있다. 그때는, 확신을 따라가야 한다.
이유는? 역시나 모른다. 그냥 그런 거다. 따지지 말자. 말 많으면 공산당이다. 이계성이라는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아 주민센터에 가서 몇 가지 확인을 해야겠다. 이계성 할머니의 공책을 가방에 넣고, 혹시 몰라 구입했던 양주 중 한 병을 가방에 넣고 출발한다. 날은 추웠고, 추웠기에 청량했다. 기분도 청량해진다.
주민센터에 도착해 보니 수진이가 야근 중이다. 며칠 동안 내 일까지 도와주다 보니 정작 자기 일을 마무리 하지 못해서 야근하고 있을 거다. 미안하다. 나중에 비싼 케이크라도 선물해야겠다. 일단은 수진이의 집중을 망치지 않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조용히 내 자리에 앉아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누른다. 수진이도 나를 한번 흘깃 바라보았을 뿐 별말이 없다. 이계성 할머니 상담기록을 보았고, 저장된 구비서류를 확인한다. 그동안의 이계성 할머니의 기초생활수급자 신청 조사 결과를 뒤진다. 이계성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14번이나 신청을 했고, 또 14번의 부적합 판정을 받았고, 기록된 것만으로도 직원과의 격전이 61회 있었다. 조사 결과내역을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모두 읽는다.
특이한 점은 이계성 할머니는 시간이 지날수록 민원의 강도가 심해졌다는 사실이다. 상담기록을 보면 이계성 할머니는 4회차 신청 때까지는 상담기록에 별 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오히려 직원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상담기록도 찾을 수 있었다. 다만 5회차 신청부터 이계성 할머니는 조금씩 불만을 제기하는 모습을 보였고, 7회차 신청부터는 직원과 정상적인 대화가 되지 않았다는 상담기록이 있다. 그리고 9회차 신청에서 주민센터에서 소란을 일으켰고, 내가 기록한 11회차부터는 극단적 모습을 보였다. 이계성 할머니는 처음부터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
이계성 할머니의 신청서 목록을 뒤져본다. 이계성 명의로 소유한 것으로 조사된 주택의 주소, 이계성 할머니가 제출한 구비서류들 중 임대계약서에 기재된 주택의 주소, 그리고 이계성 할머니의 공책에 기재된 주소는 모두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XXX-XX.’였다. 그리고 이계성 할머니 가족관계증명서에 나타난 딸의 이름. ‘지연’이라는 이름은 이계성 할머니 공책에 나온 이름과 일치했다. 끝나버렸던 이계성이라는 존재가 다시 시작됐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도 다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