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침엽수에 대한 단상
글에서 괄호 안에 표기된 문장들은 전적으로 제 상상일 뿐 실제 인물들이 생각한 것과 그 어떤 연관성도 없음을 밝혀둡니다. 재미를 위해 덧붙인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거나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ㅇ나 실장: 경력 20년 차 에디터. 질문을 하거나 받는 것 모두 좋아하는 그냥 꼰대
ㅇ이 대리: 기간제 계약직 3년을 마치고 정직원으로 채용된 열정남. 최근 이직을 고민 중이다.
ㅇ상황: 커피가 떨어진 김에 카페를 찾아 낙엽이 쌓인 길을 함께 걷고 있다.
ㅇ나 실장: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따뜻하기도 하고. 산책하기에 적당하네요. (난 부하직원 산책도 시켜주는 좋은 상사야.)
ㅇ이 대리: 네, 그렇네요.(아, 걷기 싫다. 걷기 싫어.)
ㅇ나 실장: 사무실에만 계속 앉아 있으면 몸이 낙엽처럼 썩어가는 느낌이 들어요.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살아 있다고 느껴지기도 하구요. (건강해야 일도 잘한다고.)
ㅇ이 대리: 그렇습니다.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신이 일 시켜서 그런 거잖아. 일 좀 작작 시켜라.)
ㅇ나 실장: 지난번에 함께 인바디 했을 때 난 앞으로 1킬로그램 정도 감량하라고 나오더군요. 이 대리는 결과가 좋았나요? (흠흠. 튼튼한 내 팔다리 근육이 보이냐?)
ㅇ이 대리: 아, 음, 저, 저는 10킬로 빼라고 나왔습니다. (이게 다 업무 스트레스를 술로 풀어서 그렇잖아. ㅠㅠ)
ㅇ나 실장: 헐. 10킬로? 한 일 년은 걸리겠군요. 쉽지는 않겠지만, 운동도 꾸준히 하고 식단도 조절해 보세요. 살은 운동만으로는 안 빠진다고 의사가 그러더군요. (젊은 사람이 왜 그 모양인지. 그렇게 게을러서야.)
ㅇ이 대리: 그래야지요. 그런데 혼자 살면 식사 조절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니가 밥 챙겨줄 거 아니면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ㅇ나 실장: 전에 보니까 아침에 출근해서 컵라면 먹고 그러던데, 그런 거 먹으면 살 안 빠집니다. 먹는 것도 건강하게 먹어야 해요. 나이 들어서 후회하지 말고. (내가 샐러드 도시락 먹는 거 봤지? 나 따라 하라고.)
ㅇ이 대리: 아, 네. 죄송합니다. (니가 원룸 살아봐라. 요리가 가능한가. 코딱지 만한 냉장고에 뭐 들어가지도 않는다.)
ㅇ나 실장: (낙엽이 쌓인 풀밭을 바라보다가) 이 대리는 나무가 된다면 어떤 나무가 되고 싶나요? (이런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하면 폼 나게 보인다던데.)
ㅇ이 대리: 네? 나무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요? (뭔 헛소리야. 나무가 왜 되고 싶은데?)
ㅇ나 실장: 뭐 그냥 상상을 해 봐요. 음. 고르기 어려울 테니 예를 들어 볼까요? 나무는 크게 침엽수와 활엽수로 나눌 수 있잖아요? 둘 중에서 하나 골라 보세요. (당황하는 모습 보니까 재미있네. ^^)
ㅇ이 대리: 아.......... 저는 활엽수로 하겠습니다. 이파리도 널찍하니 풍성해 보이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실장님은요? (뭐 아무렇게나 말해야지. 니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뭔데?)
ㅇ나 실장: 나? 나는 저 메타세콰이어 같은 침엽수가 되고 싶어요. (걸려들었다, 요놈.)
ㅇ이 대리: 어.......... 뭐 늘 푸르른 절개, 뭐 그런 게 좋아 보여서 그렇습니까? (그래, 그래, 그런 속내가 있겠지. 그냥 뭐 물어봤겠냐?)
ㅇ나 실장: 음. 그건 아니구요. 침엽수도 잎이 떨어집니다. 시들기도 하구요. 저 메타세콰이어는 낙엽침엽수라서 가을이면 잎이 모두 떨어지지요. (이런 상식은 몰랐겠지?)
ㅇ이 대리: 아. 네. (그래, 너 잘 났다. 나 무식하고.)
ㅇ나 실장: 그런데 활엽수와 침엽수 낙엽을 비교해 보면 차이가 있어요. (이제 본격적으로 내 식견을 자랑해 보겠다.)
ㅇ이 대리: 뭐가 다르죠? (그래. 다르겠지. 이름도 다르고, 생긴 것도 다르잖아. 또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데?)
ㅇ나 실장: 활엽수 낙엽은 나무 아래 풀들을 모두 덮어 버립니다. 온통 자기 색깔로 대지를 물들여 버리지요. 햇볕도 모두 가리구요. 그래서 함께 자라야 할 작은 풀들이 기운을 잃고 금방 시들어 버린답니다. 그런데 낙엽침엽수 같은 경우에는 잎이 가늘고 길잖아요? 그리고 잘게 부서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낙엽이 풀들을 가리지 않고 사이사이에 떨어집니다. 풀이 가지고 있는 색깔에 자신이 가진 색을 더할 뿐이죠.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가 가진 것으로 남을 다 가려버리고 방해하는 활엽수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더해서 조화롭게 새로운 색감을 내는 침엽수처럼 말이죠. (캬아. 방금 지어낸 말인데, 내가 생각해도 멋지다. 멋지지? 멋지지? 안 멋져? 이게 안 멋져?)
ㅇ이 대리: 오....... 무슨 시 같습니다. (우와, 시적인 헛소리다. 헛소리도 저렇게 할 수 있구나.)
ㅇ나 실장: 이 대리도 나중에 부서장이 될 텐데, 그럴 때 부하직원들을 자신이 가진 생각과 의지로 모두 덮어 버리는 사람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이사이 빈 틈을 메워주고 밑거름이 되어 주는 부서장이 되어 주세요. (이야. 이걸 업무랑 연결시키다니. 나 천재인가 봐. 언어 천재.)
ㅇ이 대리: 네. 알겠습니다. (이야, 자기가 그런 부서장이라고 착각하고 있구나. 대단하다.)
ㅇ나 실장: 그래그래.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ㅇ이 대리:: 저기 카페가 있네요. 들어가 보시죠! (이제 그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