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라라 Sep 20. 2023

근대화에 사로잡혀 박제된 거리

1897 개항문화거리 (일본가옥 편)

공식적으로 한반도에는 호랑이가 살고 있지 않습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요? 조금만 참고 들어주세요. 우리나라는 1993년,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는 CITES(the Convention on International Trade in Endangered Species of Wild Fauna and Flora,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에 가입했습니다. '협약 부속서'에는 한때 우리나라 야생에 서식했으나 지금은 멸종위기에 처한 것으로 알려진 동물들인 호랑이, 반달가슴곰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협약 당사국들은 멸종위기종 서식과 불법 거래 및 유통현황에 대한 정기보고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환경부는 1996년 4월 10일, CITES 사무국에 「호랑이 보호를 위한 국가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호랑이는 1900년대에 한반도 전역에서 서식하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조직적인 포획과 산림황폐로 인한 서식지파괴 등으로 1943년 이후 완전히 멸종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도 호랑이를 볼 수 있습니다. 유명 동물원에 가면 한반도 호랑이와 같은 종인 시베리아 호랑이들이 사육되고 있는 것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용인에 있는 모 공원에 가면 관람용 차량을 타고 호랑이들 사이를 누비며 늠름한 자태와 포효를 창문 너머로 관찰할 수도 있습니다.


호랑이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또 있습니다. 박제된 호랑이입니다. 지금은 불법이지만, 과거 먼 옛날에는 호랑이를 유해조수로 분류해 사냥꾼들을 조직해서 사냥하고, 고기와 뼈는 비싼 값에 팔려나갔습니다. 그리고 가죽은 고급 장식품으로 만들어지거나 살아있을 때와 비슷한 모습으로 박제되어 전시되곤 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오늘 가볼 곳은 '1897 개항문화거리'입니다. 개항문화거리는 목포시가 슬럼화되어 가던 원도심을 재생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조성한 거리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목포역에서 가까운 번화로 중 '구 목포화신연쇄점'부터 '목포유달초등학교'까지 이어진 일방통행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길은 잘 포장된 차로와 좌우로 오래된 건물들이 늘어서 있어서 길 위에 있는 박물관으로 불립니다. 도로 중간중간에는 1897 개항문화거리라는 표지를 달고 있는 가로등이 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길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할 수 있지만, 과거 개항기부터 근대화를 거치는 기간 동안 이 길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경제와 문화 중심지였습니다. 단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지역 원로들은 이 길이 전라도 지역에서 최초로 아스팔트 포장이 이루어진 곳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길을 제대로 들어섰는지를 확인하려면 가로등을 보면 됩니다.


자, 그럼 1897 개항문화거리를 가 보겠습니다. 먼저 경로와 볼거리를 정해야겠지요. 관광객들이 처음 목포를 방문하면 대부분 목포역이나 신도심 방향에서 여행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1897 개항문화거리를 여행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보통 구 목포화신연쇄점이나 목포대중음악의전당(구 호남은행 목포지점)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반대편 끝, 그러니까 목포 유달초등학교에서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유달초등학교 부근이 과거 모습을 훨씬 잘 보존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조용하며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897 개항문화거리는 민어의 거리를 기점으로 주택가와 상가로 나뉩니다. 유달초등학교에서 민어의 거리까지는 예부터 일본인들이 정착해서 살던 거류민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공립심상소학교'를 세웠고 지금 목포유달초등학교가 있는 자리입니다.


두 번째는 보행안전 측면에서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뭔 소리냐고요? 앞부분에서 1897 개항문화거리를 소개할 때 '일방통행로'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이 도로는 차와 사람이 함께 다니게 조성되었습니다. 조금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 조성된 구간이다 보니 차량이 왕복해서 다닐 수 있도록 하기에는 너무 협소했습니다. 그래서 목포시는 이 구간을 차량 일방통행로로 만들고 좌우에 차를 정차하거나 사람이 보행할 수 있는 구간으로 나눠서 조성했습니다. 일방통행 방향은 구 목포화신연쇄점이 자리 잡고 있는 네거리에서 목포유달초등학교 건널목으로 이어지는 쪽입니다. 그러다 보니 구 화신연쇄점에서 도보로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좌우에 늘어선 상점과 옛 건물들을 구경하다 보면 뒤에서 달려오는 차량을 확인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대신 반대편 유달초등학교 방향에서 걸어오면 시야 멀리서 접근하는 차량을 미리 인지하고 피할 수 있습니다. 보행자가 차량이 접근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안전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차량이 보행자를 추돌하는 사고 대부분은 후방에서 추돌하는 것입니다.




자자, 서론이 길었습니다. 본격적으로 1897 개항문화거리 도보여행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들러야 할 곳은 바로 유달초등학교입니다. "응? 초등학교를 왜 가? 거기가 옛날에 지어진 건물 그대로야?" 절반은 맞고 절반은 아닙니다. 유달초등학교가 있는 곳은 과거 일제강점기이던 1899년, 일본 거류민 자녀들을 위해 지은 '목포공립심상소학교'가 이전해 자리 잡았던 곳입니다. 대부분 건물은 새로 개축해서 남아있지 않지만 1929년, 당시로서는 최신 공법인 철근콘크리트를 활용해 건축되었던 강당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독특한 것은 기둥과 주요 구조물은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했지만 내부 계단 등은 목조를 사용했고, 멀리서 지붕을 바라보면 일반 목조건물처럼 지붕이 솟아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건물은 등록문화제 제30호이자 전남교육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구 목포공립소학교 강당 내부는 관람할 수 없었습니다. 예전에 활용하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거나,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유지한 채로 과거 흔적을 찾아볼 수 있게 꾸민다면 좋겠습니다.


자, 다음은 바로 옆에 있는 유달초등학교 교무실입니다. "잠깐, 왜 초등학교 교무실로 가요?" 아, 그렇군요. 바로 교무실로 가면 안 되고 경비실로 가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마지막 조선 호랑이' 박제를 보려면 학교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

<알고 가면 너무 달달한 꿀팁!>

*일반 초등학교는 학생들 안전과 면학분위기 조성을 이유로 학부모를 제외한 외부인들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됩니다. 최근 사건사고가 많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목포유달초등학교는 '마지막 조선 호랑이'를 보고 싶어 하는 관광객들을 위한 안내절차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무턱대고 학교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먼저 건물 외부에 마련되어 있는 경비실로 가서 방문 목적을 밝히고 경비원분 안내를 받아서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먼저 방문객용 실내화로 갈아 신고 교무실이 있는 1층 복도로 가서 교무실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전시물을 조용히 관람하면 됩니다. 전시물 앞에는 방명록과 박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담긴 유인물이 있습니다.

*유의할 것은 세월이 흐르고 보존 방법이 전문적이지 않아 호랑이 박제는 심각하게 백화白化가 진행된 상태입니다. 사진촬영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사전에 양해를 구하고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최소한의 이미지만을 담아 왔습니다.)

--------------------


1층 교무실 옆으로 가면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호랑이 박제이자 조선시대에 살았던 마지막 호랑이가 있습니다. 이 박제는 1908년 전남 영광에 있는 불갑산에서 함정에 빠져있는 호랑이를 농부가 포획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호랑이는 암컷으로 추정 연령은 10살 정도입니다. 시베리아 호랑이와 비교할 때 다소 크기가 작지만 무늬가 선명하고 털이 짧은 것이 한반도에 서식했던 호랑이들이 가지고 있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호랑이를 잡은 사람들은 목포까지 죽은 호랑이 사체를 가져와 경매에 붙였고, 하라쿠지 소지로라는 일본인이 낙찰받아 박제로 만들어 소학교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 온 숲을 호령하며 동물세계 군주였을 호랑이가 처량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조금 착잡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심상소학교를 다녔던 일본인들은 한국으로 여행 오면 이 호랑이를 보기 위해 꼭 찾는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이 호랑이는 강제로 포획되고 박제되어 자랑거리이자 구경거리로 삼았던 당시 조선과 같은 이미지였을 겁니다. 무거운 마음을 덜어내기 위해 서둘러 학교 밖으로 나가봅니다.


이제부터 거리에 있는 일본식 가옥들을 구경할 차례입니다. 학교 바로 맞은편에 일본식 가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1937년에 지어진 것으로 집 위에 집이 다시 올려진 것 같은 모습을 한 2층 구조로, 주변에 있는 다른 오래된 일본식 주택들 중에서 가장 큽니다. 1층과 2층 지붕이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일제강점기 심상소학교 전경 사진에도 이 건물이 보입니다.


1897 개항문화거리에 들어서면 오른편으로는 옛 일본식 주택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대부분 1930년대 중반에 지어진 것들입니다. 외형은 과거 전형적인 일본식 건축형태를 띠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일부 가옥들은 지붕과 외장재들을 현대식 자재를 사용해 유지보수 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누수에 취약한 지붕 기와들은 기와를 닮은 현대식 건축재로 교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현재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으며, 카페나 음식점들로 운영되다가 그마저도 지금은 비어있습니다. 입구에 보면 대부분 임대 또는 매매한다는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반대편, 그러니까 유달초등학교를 등지고 목포역 방향으로 갈 때 오른쪽에 있는 집들은 대형 저택들입니다. 크기도 맞은편에 있는 주택들 두세 개를 합친 것보다 더 큽니다. 일부는 현재도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현대식 주택으로 재건축되거나 개량되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과거 '목포부립병원 관사'로 사용되던 건물입니다. 처음에는 일본상인 모리타 센스케 守田 千助라는 사람 소유였으나 이후 병원 관사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해방 후에는 바로 옆에 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을 해군이 사용하면서 해군관사로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카페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집 안쪽은 깔끔하게 인테리어를 해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정원과 건물 외형은 120여 년 전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특히 정원에 있는 오래된 나무들과 지붕 기와, 나무 외장재들은 마치 1900년대 초를 그대로 박제해 둔 것 같습니다. 나이 든 카페 여주인은 이 건물이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건물 유지보수도 어려워지고 관리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특히 누수가 심한 지붕 기와 같은 경우에는 똑같은 재료를 구할 수도 없어서 골치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주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나오면 바로 맞은편에 자그마한 건물이 보입니다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낡은 창고처럼 보입니다. 가까이 가 보니 '구 목포 일본 기독 교회'라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 건물이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다니던 교회 건물이었다는 겁니다. 일본은 메이지 이후 신도를 권장하고 서양 종교를 배척했던 문화 때문에 기독교 신자가 매우 드물었습니다. 아마도 개항과 함께 이 지역에 대규모로 유입되었던 유럽 선교사들 영향으로 일본인들이 다니는 기독교 교회가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단적인 예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유일한 일본인 기독교 교회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인 윤치호와 결혼한 후에 평생을 목포 공생원에서 고아들을 보살폈던 윤학자(일본이름 타우치 치즈코 田内 千鶴子) 여사가 다녔던 교회로 유명합니다. 내부를 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는데, 아쉽게도 문은 굳게 닫혀있습니다.


-----------------------

<함께 보면 좋은 것들>

*바로 옆에는 일본제국이 식민지 지배를 위해 세웠던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사 건물이 목포근대역사관 2관으로 박제되어 남아 있고, 구 목포일본영사관 건물은 목포근대역사관 1관으로 역시 박제되어 남아있습니다.

-----------------------


이 거리는 마지막 조선 호랑이부터 목포근대역사관까지 모두 1920년대와 1930년대를 그대로 박제해 놓은 모습입니다. 물론 사이사이 바뀌고 변형되고 훼손된 모습도 가지고 있지만 그것마저도 백화가 심하게 진행된 호랑이 박제와 닮아 보입니다. 어떤 것은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손을 보기도 했지만 그마저 원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거나 생기 있게 사용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일부 카페를 제외하고는 말이죠. 관광객들을 위해 카페나 음식점으로 모습을 바꾸는 것도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민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옛 모습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모두 개인에게 맡기고 의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1920년대나 1930년대 모습으로 복원하는데 필요한 전문가를 양성하고나 소재를 구하는 노력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참고자료

노대현, 목포산책, 광주, 전남대학교출판문화원, 2019.

최성환, 목포, 파주, 21세기북스, 2020.

1897 개항문화거리 도보여행 가이드, 목포시.



[관람 정보]

[주소] 전라남도 목포시 영산로 10번길 10

[관람료] 없음.

[관람시간] 제한없음.

(마지막 조선 호랑이는 평일 주간 시간대에만 가능합니다. 카페는 개별 영업시간, 전시관은 개별 운영시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주차 정보] 목포근대역사관 2관 전용 주차장 있음.

이전 13화 바다에서 건져 올린 원대한 미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