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라라 Sep 11. 2023

개화기에서 근대화, 현대를 잇는 거대한 줄기

 국도 1, 2호선 기점

생각해 보면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물론 기원을 알기 어려울 만큼 오래된 것이나 아직 그 끝에 다다르지 못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릅니다. 그리고 시작과 끝이 애매한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손쉽게 사용하고 있는 숫자는 그 시작과 끝을 쉽게 단정하지 못합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숫자는 당연히 일one 一 1부터 시작하는 것 아니냐고요? 그래요. 맞습니다. 맞다고 합시다. 이번 주제를 시작하기에 딱 좋은 질문입니다.


우리가 걷거나 차를 타고 다니는 길은 어떨까요? 일상생활에서, 아니 여행하면서도 우리는 어떤 길이 공식적으로 시작되거나 끝나는 지점을 지나는 경우가 없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걷다가 막다른 곳에 다다르면 보통 당황하게 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를 가로막았다고 여겼던 그곳이 어쩌면 우리가 걸어온 길이 시작하는 지점일지도 모릅니다.


근대적 관점에서 우리나라 첫 번째 도로는 국도 1호선과 2호선입니다. 왜 1호선이 아니고 1호선과 2호선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길들을 국도와 지방도로 구분하고 국가에서 국도 國道로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 1971년 8월 31일이고, 그때 공식적으로 번호가 부여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길은 그 이전에도 있었고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습니다. 대통령령 제5771호 별표 '일반국도노선'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도 제1호는 전라남도 목포에서 시작해서 평안북도 신의주시 압록강교까지 이어진 도로를 말합니다. 국도 제2호는 전라남도 목포에서 시작해서 부산까지 이어진 도로입니다. 

1971년 8월 31일, 대통령령 제5771호로 제정되고 시행된 일반국도노선저정령에 따라 국도 제1호와 2호가 지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곳을 제쳐두고 공식적으로 두 국도가 시작하는 기점을 모두 목포로 지정했을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현재 국도 제1호선 노선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만든 '신작로'를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1897년 개항과 함께 일본제국은 목포와 대한제국 전체를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망을 개설하는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도로가 이미 발달했던 서울(당시 한성)과 경기, 충청지역은 기존 도로를 활용했지만 그 이남지역은 새로 개항해 거점으로 삼은 목포와 바로 연결해야 했기 때문에 직선으로 도로를 새로 개설했습니다. 물론 수탈한 미곡을 효율적으로 운송하고 향후 식민통치에 편리하도록 하고자 하는 목적이었습니다.


원래 조선시대 주요 도로망은 용도와 목적지에 따라 9개로 구분되었는데, 서울을 중심으로 의주, 서수라, 동해, 부산, 통영, 제주도, 수영, 강화를 각각 잇는 도로였습니다. 그중 좌로左路였던 제7로는 충청도를 거쳐서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그리고 수로水路로 제주도까지 연결되는 도로망이었습니다.


물론 국가가 지정한 도로망이라고 해도 지금과 같이 넓고 이용하기에 편리했던 것은 아닙니다. 특수한 목적을 위해 개설했던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살던 마을과 마을을 이은 길과 지형적인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길들을 하나로 연결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외교고문으로 일했던 파올 게오르그 폰 묄렌도르프 Paul Georg von Möllendorf가 남긴 기록을 살펴보면 길이 조악하고 교량도 드물었다고 합니다. 1894년에서 1897년 사이에 한국 여러 곳을 여행했던 영국인 탐험가 이사벨라 버드Isabella L. Bird는 여행기에서 "도로들은 악명이 높다. 주요 도로들도 거친 승마로 보다 나을 바가 없다. 짐들은 어디나 사람이나 황소 그리고 당나귀로 운반했다"라고 묘사했습니다.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이후 가장 먼저 착수한 사업이 도로를 정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최우선 순위는 내륙과 항만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였습니다. 1906년 3월부터 시작된 7개년 계획을 통해 건설된 도로들을 '신작로'라고 불렀습니다. 이전에 존재하던 도로들에 비해 매우 곧고 폭이 넓었습니다. 이 도로정비 사업은 대부분 대륙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기 위한 정책에 따라 시행되었습니다. 그리고 곡창지대인 호남지방과 목포와 군산항을 연결하는 도로는 미곡을 반출하기 위한 목적이 컸습니다. 일본 제국은 도로개선을 완료하고 나서 목포에서 서울을 거쳐 신의주까지의 도로를 정비하고 경성부를 기점으로 신의주가 종점인 도로를 국도 2호선, 경성부를 기점으로 목포부가 종점인 도로를 3호선으로 각각 이름 붙였습니다. 국도 제1호선은 경성부산선으로 경성부가 기점이고 부산부가 종점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 관보를 보면 국도 제3호선은 경성을 기점으로, 목포부를 종점으로 한다고 고시하고 있습니다.
1950년대 안양과 수원을 잇는 신작로 모습. 출처: 김경수, 한국사 테마전


목포 유달산 우체국(전남 목포시 영산로 33) 바로 옆에는 1971년 국도 1,2호선이 지정된 것을 기념하는 도로 원표와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최초 도로기점은 동경 126도 22분 52초, 북위 34도 47분 01초로, 도로원표에서 조금 떨어진 지점입니다. 물론 이후 국도가 더욱 연장되어 현재 시점에서 국도 1호선 기점은 전라남도 목포시 달동(고하도)으로, 2호선의 기점은 전라남도 신안군 장산면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목포지역에서는 국도 1,2호선 기점 기념비를 통해 과거 이 지역이 가지고 있던 위상과 역사성을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국도 1호가 신의주까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남북통일을 상징하고, 국도 2호가 부산까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서화합을 상징한다며 특별한 의미도 부여했습니다. 목포에 남아 있는 많은 근대화 상징들과 함께 이 도로기점 기념비도 과거 목포가 누렸던 번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도로기점기념비 뒤편으로는 구 일본영사관 건물이 보입니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목포가 대한민국에 과거 개항 이후 근대화시기에 가졌던 명성을 다시금 되찾아 올 것이라는 목포시민들이 품고 있는 희망과 기대를 응집시켜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 옆으로 눈을 돌려서 이 상징을 다른 관점에서 재조명했으면 합니다. 국도 1,2호 기점기념비는 구 목포우체국, 현재는 목포시 유달산우체국 건물 주차장 바로 옆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리 주목하고 있지 않지만 유달산우체국은 고종이 직접 명령하여 목포를 개행했던 시점에 개설되었던 근대식 공공기관 세 곳 중 하나였습니다. 1897년 개항 이후 대한제국은 외교와 통상 업무를 전담할 '감리서', 외국 선박들에게 관세를 부과하는 업무를 담당할 '해관'과 더불어 이곳에 '무안우체사'를 설치했습니다. (1897년 12월 29일, 농상공부령 제22호)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이후 우정총국이 폐지되었지만 1895년 6월 1일 한성과 인천 간 우체사무를 재개하면서 우리나라 근대우편제도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 목포에 설치된 우체사를 목포우체사라고 하지 않고 무안우체사라고 한 것은 당시에는 목포라는 행정구역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후 목포우체국은 오히려 무안과 인근 도서지역 전체를 총괄하는 지역거점 우체국이 되어 있습니다. 목포우체국은 규모는 물론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섬을 연결하는 우편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1897년 12월 개설되었던 무안우체사는 일본이 각국거류지 일본영사관 건물 안에서 운영하고 목포 일본우편국과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일본우편국은 1899년 8월 현재 초원관광호텔 부지, 과거 목포경찰서 자리로 청사를 이전하였습니다. 당시 무안우체사와 전보사는 각국 거류지 바깥에 있던 만복동, 현재 유달초등학교 앞 우체국 관사터에 합동청사를 짓고 사무를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우편국이 전보를 취급하지 못해서 무안우체국과 전보사는 일본인은 물론 많은 외국인들이 찾았습니다. 하지만 1905년 한일 통신기관 협정체결에 따라서 5월 27일 무안우체사와 전보사는 일본 목포우편국에 강제 합병인수되면서 목포지역 우편통신권도 일본에 피탈되었습니다. 그 후 일본은 1906년 6월 현재 목포 유달산우체국 자리로 건물을 신축하여 확장 이전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이 개항과 함께 이곳에 무안우체사를 개설했던 목적은 의외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목포를 개항하고 각국 거류지를 건설하면 이곳에는 영사관을 비롯해 외국선박회사, 무역회사, 금융기관들이 자리를 잡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다양한 국적을 가진 외국인들이 급격하게 유입되고, 그들은 자국으로부터 이색적인 문화와 진기한 해외 정보나 소식들을 함께 가지고 들어올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대한제국 입장에서는 그러한 소식과 정보를 가능한 한 빠르게 한성까지 전달하고 그들이 들여온 물품들을 운송할 근대적인 우편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우체사 개설은 단순하게 편지를 주고받게 하는 제도를 도입했다는 의미를 아득히 뛰어넘습니다. 현대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첨단 정보통신과 물류 유통이라는 사회 발전에 필수적인 시스템을 목포에 정착시키고자 했던 원대한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목포가 급격하게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핵심은 일본으로부터 대규모 자본이 유입되고 다른 지역으로부터 막대한 물자와 인원이 목포로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국도 1,2호선 기점이 근간으로 삼았던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만들었던 국도와 더불어 우체사는 자본, 물자, 인원, 정보들을 빠르게 유통시켜 근대화를 이룰 수 있게 만들었던 핵심 인프라가 되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도 1,2호선 기점 기념비와 유달산우체국 건물에는 과거 선조들이 품었던 원대한 계획은 물론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유달산우체국 앞에는 2008년 세운 개국 111주년 기념비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관점에서 도로기점도 새로 지정하면 어떨까라고 생각합니다. 과거가 모두 옳고 그 과거와 다른 현재가 모두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길이 시작되고 끝나는 지점은 그 길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이 건국되고 전국에 있는 도로를 한양을 기점으로 재정비했을 때 전국으로 이어졌던 모든 도로 기점은 창덕궁에 있는 돈화문이었습니다. 현재 교보빌딩 앞에 자리 잡고 있는 기념비전紀念碑殿 안에는 그것을 상징하는 기점표가 있습니다. 기념비전 남쪽 오른쪽 돌기둥 안에 표석이 하나 서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자세히 보면 '도로원표道路元標'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477km라고 할 때 기준으로 삼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 앞을 기준으로 했었는데 1914년 4월 세종로 네거리로 기점을 바꾸며 원표를 설치했고, 이후 세종로 도로를 확장하면서 1935년 기념비전 옆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참고자료

김경수, 한국사 테마전(개정판), 돋을새김, 서울, 2007.

Isabella L. Bird, Korea and her neighbers: A narrative of travel, with an account of the recent vicissitudes and present position of the country(Kindle edition), Good press, 2023.

朝鮮總督府告示第956號(1938.12.01), 朝鮮道路令第13條ノ規定ニ依リ國道ノ路線左ノ通認定ス.




<함께 보면 좋은 것들>

*국도 1,2호선 기점기념비 바로 뒤편 언덕 위에는 과거 일본영사관으로 사용되었던 목포근대역사관 1관이 있습니다. 목포근대역사관 1관은 당시 역사・정치・사회적 격변을 한꺼번에 이해하는데 가장 적합한 장소입니다. 이 건물은 1900년에 완공된 벽돌조 건물로 근대역사문화공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 건축물이면서 건축 당시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건축과 역사적 측면에서도 매우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받습니다.

*조금만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목포근대역사관 2관이 있습니다. 이 건물은 일본이 식민지 착취와 경영을 위해 세웠던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이었습니다. 이 건물은 1921년 11월에 완공되었고,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지점 건물 세 곳 중에서 규모면으로는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목포근대역사관 2관 건물은 우리나라 해군과 해양경찰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해방 이후인 1946년 조선해안경비대가 창설될 당시 목포경비부 건물로 활용되었습니다. 이후 1989년까지 해군 목포해역방어사령부 헌병대 건물로 사용되었습니다.


--------------------

<알고 가면 너무 달달한 꿀팁!>

*국도 1,2호 기점기념비에는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기관이 세워둔 표지석이나 안내표시가 세워져있습니다. 이 정보들이 서로 상이한 정보를 담고 있다고 해서 논란이 된 적도 있습니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모든 표지석에 있는 내용을 꼼꼼하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국도 1,2호선 기점은 여러번 변경되었습니다. 사전에 바뀐 장소들을 메모해뒀다가 각 지점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을 함께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기념비 바로 앞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촬영하면 뒤편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 목포근대역사관 1관을 한 프레임에 담을 수 있습니다.




[관람 정보]

[주소] 전라남도 목포시 영산로 33 

[관람료] 무료

[관람시간] 제한 없음.

[주차 정보] 바로 옆에 목포 유달산우체국 주차장 있음.


이전 11화 시민들이 지켜낸 민족자본은행 유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