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 개항문화거리 (상가 편)
이번 서론은 일부 여성분들에게 다소 불편함을 줄 수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내용은 순수한 창작이며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미리 강조합니다. 특히 일반화해서 표현한 내용에 대해서 실제와 맞지 않다거나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거나 혹은 반대되는 사례가 많다는 이유로 태클을 걸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남성들이 가지는 호기심이나 선호 중에서 여성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아마도 자기 여자친구가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 즉 맨얼굴에 대한 호기심이나 선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호감을 가지고 만남을 이어가는 사이에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남성들은 여성에게 화장을 하지 않고 나오면 어떻겠냐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여성들은 대부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물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말이지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정성 들여 메이크업을 하는데, 정작 상대방이 그것에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맨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 왜??
어떤 분들은 여성들이 자신을 꾸미는 것이 자기만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통계를 살펴보면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만은 아닙니다. 10대 여성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보면 50% 정도가 자기만족을 위해 화장을 한다고 답을 합니다. 그러니 그 '어떤 분들' 생각이 맞습니다. 하지만 설문대상자 연령을 확대하면 답변 비율은 급격하게 변화합니다. 화장을 하고 싶지 않지만 남들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아집니다. 특히 일반 회사원이나 고객을 직접 대면하는 직업을 가진 경우 화장은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절차이자 예절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도입에서 제기했던 의문으로 돌아가서 남성들이 상대에게 맨얼굴을 요구하는 이유는 뭘까요? 통계에 따르면 맨얼굴이 화장한 얼굴 보다 더 귀여워 보여 선호한다는 답변이 많았고, 그다음은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면 더욱 친밀감을 느끼게 되어서 그렇다는 답변과 맨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어서 좋아한다는 답변이 뒤를 이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뭐 여성들 화장에 대한 건가? 1897 개항문화거리 이야기라며?" 맞습니다. 이제 가 볼 곳은 지난 1897 개항문화거리 일본주택 편에 이은 상점가 편입니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화장 이야기냐고요? 나중에 나옵니다.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1897 개항문화거리는 개항부터 근대화에 이르는 기간 동안 수많은 상점들이 들어서고 나가기를 반복하면서도 상업적 중심지로서 위상을 잃지 않았던 거리입니다. 일본인 거류지역에 인구가 급격하게 유입되고 그들이 일하는 공공기관과 회사들이 들어서면서 그들에게 필수품을 공급하기 위한 가게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택가 바로 옆으로 자연스럽게 상가가 형성되었습니다. 더구나 바로 가까운 거리에 항구와 기차역이 있어서 외부로부터 물품을 공급받기가 쉬웠기 때문에 상점 주인들은 다른 지역보다 이곳을 선호했습니다. 물론 항구와 가깝기 때문에 선원들이나 승객들이 머물 숙박시설과 식당들도 함께 만들어졌지만, 주택가 인근에는 상점 비율이 훨씬 높았습니다.
다른 도시에 형성된 상가지역을 돌아보면 건물들 높이나 크기들이 유사합니다. 하지만 1897 개항문화거리는 그곳들 보다 더욱 표준화되고 정교하게 구획된 느낌이 듭니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은 이곳에 대규모 간척사업을 진행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기본설계를 네덜란드 토목기사 스테든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토지형질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간척공사 후 대부분은 100평방미터를 기준으로 공매 절차를 통해 일본인들에게 판매했습니다. 개인이 취득할 수 있는 토지 크기가 비슷했던 것이죠. 그리고 업종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상품을 진열하고 고객들을 맞이하는데 필요한 공간 그리고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 같은 공통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많은 상점들이 표준화된 규격에 맞춰 세워지곤 했습니다. 물론 도로에 접한 부분이 얼마나 넓은가를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던 조세정책과 인접한 건물주와 사전에 합의가 된다면 건축법상 필수적인 '이격거리'를 두지 않을 수 있도록 한 당시 규정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새 건물을 지을 때 옆 건물과 벽을 맞대어야 하기 때문에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대부분 비슷한 폭과 동일한 높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공급받기 쉬운 건축소재와 유행하던 공법을 따랐기 때문에 형태도 유사했습니다. 그래서 거리에서 상점 건물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간판만 서로 다른 똑같은 건물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건물주가 여러 상점들이 들어설 수 있는 길고 큰 건물을 지은 다음에 나눠서 임대해 주고 세를 받았기 때문에 인접한 가게들은 더 똑같은 모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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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상식 1]
개항 당시 각국거류지 시가지계획은 구역별 용도에 따라 도로 폭을 8미터에서 15미터까지 각각 세분화해서 나누고, 공공부지를 제외한 나머지 택지를 A, B, C 세 지구로 구분하여 순차적으로 공매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A지구는 초지나 평탄한 저지부 低地部로 지금으로 따지면 중앙동이나 대의동에 해당합니다. B지구는 언덕이나 경사지로 유달동, 만호동, 측후동 같은 곳입니다. C지구는 바닷가 갯벌이었기 때문에 매립해서 사용해야 하는 지역으로 지금의 광동, 보광동, 행복동, 상락동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안타깝게도 당시 일본인들이 거주할 것으로 예상된 지역에는 도로, 상수도, 소방시설 등 사회기반시설을 함께 건설하도록 계획에 반영되어 있었지만, 그 이외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제외해서 실제로 생활하는데 매우 불편했다고 합니다. 특히 목포는 과거부터 식수로 사용할 수자원이 부족한 지역으로 조선인들은 물지게를 지고 다니는 상인들에게 물을 사 먹어야 할 정도로 환경이 열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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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1897 개항문화거리 상점가로 나가 보겠습니다. 오래된 일본식 가옥들을 지나면 고즈넉한 분위기가 갑자기 사라집니다.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 때문에 도로 폭도 훨씬 좁게 느껴집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상가건물들 상당수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건물들로 대체되었습니다. 옛 건물들 흔적이 남아 있는 것들도 있지만 현대식 네모 반듯한 철근콘크리트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 지역에서 자리 잡고 오랜 기간 영업을 해온 식당이나 마트 같은 가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지역에 불어닥쳤던 경기침체 영향으로 사무실로 사용되었던 건물들은 대부분 비어있습니다.
네거리를 지나면 목포가 항구도시라는 것을 다시 일깨워주는 듯이 바다내음을 짙게 토해내는 횟집들이 한 블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관관객들을 태운 버스들도 보이는 것이 조금 전 지나왔던 을씨년스러운 사무실 건물들보다는 활기차 보입니다. 낮은 식당 건물 뒤로 목포진 모습도 흘깃흘깃 보입니다. 1897 개항문화거리 중에서 이 구역이 제일 살아있는 느낌을 줍니다. 목포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식사를 하기 위해서 가장 많이 찾는 지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 여기에 '민어의 거리'라는 타이틀이 붙었는지 이해가 됩니다.
민어의 거리를 지나니 분위기가 급격하게 바뀝니다. 지금 기준에서는 다소 모호하지만, 근대화 시기에는 '모던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을 듯한 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대부분 2층 건물들이고 간혹 큰 가게들은 3층 높이입니다. 오래된 건물을 외벽만 새롭게 채색하거나 현대적인 소재를 사용한 외장재를 덧댄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상점가 입구 모서리를 차지하는 3층 건물입니다. 멀리서 봐도 눈에 들어오는 외장 인테리어까지 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건물 모서리에 '목포모자아트갤러리'라는 간판이 보입니다. 특이하게 건물 1층과 2층 사이 공간에 '갑甲'이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네거리가 아닌 도로와 평행한 건물면에는 '갑자옥모자점'이라는 간판이 따로 적혀있습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 모자 체인점이었던 '갑자옥모자점' 본점 건물입니다. '조선 최초 체인점'이라는 타이틀도 보유하고 있던 가게라고 합니다. 개항과 더불어 들어온 외국인들이 서양식 모자 유행을 전파했고, 1895년 내려졌던 단발령 영향으로 많은 남성들이 이전에 썼던 전통모자를 대체할 서양식 모자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제주도 출신으로 일본에서 공부했던 문공언은 이런 점에 착안해 1920년대에 이곳에 모자점을 열었고, 결과적으로 크게 성공해 나중에는 대전, 군산, 제주에도 지점을 열었다고 합니다. 모자에 대한 수요는 어마어마했고 모자를 팔면서 동시에 부녀자들에게 모자를 만드는 강습소도 함께 운영할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크게 성공했는지 갑자옥모자점은 이 지역을 상징하는 가게가 되었고, 가게가 있는 거리를 통상 '갑자옥 거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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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가면 너무 달달한 꿀팁! 1>
*현재 갑자옥모자점은 2020년 문을 닫고 더 이상 영업하지 않습니다. 건물을 노래연습장과 같은 다른 가게들과 나눠서 운영하거나 비어 있던 것을 시에서 매입해 '목포모자아트갤러리'라는 이름을 가진 박물관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각국 모자들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모자를 판매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원하는 문구를 모자에 자수를 넣어 기념품으로 가져갈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고 있으니 나중에 완성되면 방문해 보면 좋을 듯합니다.
*갑자옥모자점 옆 건물도 시에서 매입해 모자아트갤러리 2관으로 운용하고 있습니다. 1관 관람을 마치고 나면 잊지 말고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두 건물 뒤편에 야외 쉼터공간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더운 여름철에는 필요하지 않겠지만 날이 시원해지는 계절에는 잠시 머물며 오래된 건물들 사이에서 휴식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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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상식 2]
갑자옥모자점이 언제 문을 열었는지에 대해서 다소 이견이 있습니다. 상점 이름이 갑자옥이기 때문에 갑자년 甲子年이었던 1924년 문을 열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1937년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개업한 지 10년이 되었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 개업은 1927년 즈음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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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모자아트갤러리를 외부에서 보면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100년 전통을 가진 모자점 자리라고 하는데 계속 모자를 판매하는 곳으로 명맥을 이어갔다면 더 의미가 컸을 듯합니다. 아니면 예전 모자점 모습에 가깝게 재현해 놓은 공간이 주를 이루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발걸음을 더욱 상점가 깊은 곳으로 옮겨봅니다. 이제 진짜 옛날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건물들이 보입니다. 건물 외관이 모두 가로로 된 나무 외장마감을 하고 있는 2층 건물들입니다. 오일스탠으로 마감해서 조금 변색되었지만 바랜 모습이 더욱 가치를 더해주는 느낌입니다. 세로로 긴 창틀과 좁고 긴 가게들이 그 시절 그대로라는 인상을 줍니다. 이곳에 자리 잡고 있는 가게들은 노포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개항문화거리로 재조성 되기 전에는 대부분 오래되어 심각하게 훼손되거나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민들이 힘을 모아 노력한 결과 새로운 가게들이 입점하고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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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가면 너무 달달한 꿀팁! 2>
*이 지역은 과거 문구점이 많았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현재 기념품을 제작하는 공방으로 운영되는 건물은 목포에 처음 생긴 서점이었던 '문성당 文盛堂'이 있던 자리라고 합니다. 공방주인은 이 건물에서 태어나 자라고, 결혼 후 이곳에 공방을 열고 영업 중인 지역 안방마님입니다.
*목포는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소품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럴 때 이 공방이 제격입니다. 목포와 인근 섬 등 지역 관광명소들을 디자인요소로 삼은 다양한 액세서리와 소품들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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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을 조금 더해 봅니다. 과거 일본인들이 짓고 상점을 운영했던 건물들이 계속 보입니다. 현대식으로 보수한 것들도 있고, 절반은 현대식 외장을 하고 나머지 절반은 옛 모습 그대로인 기형적인 건물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본모습이고 진짜인지 혼란스러운 느낌입니다.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누군가 좀! 통일 좀!'이라고 속으로 외칠 것 같은 모습들 투성이입니다. 그래도 가게들 나름대로 환경변화에 적응하며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일명 '먹자골목'이 나옵니다. 이 지역 노포들이자 맛집들이 한 골목에 어깨를 서로 붙이고 경쟁하고 있습니다. 서로서로 방송에 나왔다고 자랑하며, 자신들이 이 골목에서 제일 맛있는 가게라고 뽐내고 있습니다. 지치고 배고픈 여행객들 발목을 잡기 딱 좋은 위치입니다.
화려한 맛집들 유혹을 뿌리치며 더 걸어가 봅니다. 이제 슬슬 1897 개항문화거리 끝자락이 보입니다. 마지막 건물은 구 목포화신연쇄점 木浦和信連鎖店입니다. 1935년 문을 열었던 이 상점은 당시 한성에 본점을 두고 있던 화신백화점 체인 중 하나였습니다. 이 건물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당시 가장 번화해 일본식으로 긴자 銀座라고 불리는 거리였습니다. 자본이 가장 많이 모이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현재 남아 있는 근대 상점 유적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외관도 웅장한 것이 특징입니다. 안타깝게도 여러 회사에 소유권이 이전되다가 개인 화실로 운영되었으나 지금은 폐쇄되어 흉물에 가까운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1897 개항문화거리는 아직도 화장 중입니다. 오래전 아름답고 화려했던 모습이 날로 쇠락해 버려서 화장을 하지 않으면 부끄럽다고 생각해서 그런 듯합니다. 하지만 화장보다는 건강을 되찾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요? 빈 가게들이 하나둘씩 채워지고 사람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활력을 얻게 되어 예전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화장을 하지 않아도 아름답습니다. 있는 그대로 진솔한 민낯을 드러내는 것이 더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화장을 하는 것은 그다음에 해도 충분합니다. 가리지 않아도 좋을 부분을 어색하게 덧칠하고 가리면 그것만큼 보기 민망한 것이 없습니다. 겉치레가 중요할 때가 있지만 지금 목포 1897 개항문화거리는 화장을 지우고 원래 색을 되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참고자료
노대현, 목포산책, 광주, 전남대학교출판문화원, 2019.
최성환, 목포, 파주, 21세기북스, 2020.
네이버 블로그 '지적인 마을' blog.naver.com/ockwon/30094174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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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은 것들>
구 화신연쇄점 건물 바로 옆에는 목포대중음악의전당이 있습니다.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건물로 우리나라 최초 대중음악이었던 ‘목포의 눈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