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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라 Sep 19. 2023

우치타니가 아닌 메디치가 되기로 한 성옥 聲玉

성옥기념관

안타깝게도 오래전 서민들은 최고 수준에 이른 예술가들이 만든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매우 적었습니다. 일부 대형 건축물을 제외하고는 말이지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대형 미술작품과 같은 것을 제작하려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기간 동안 화가와 그를 보조하는 사람들이 먹고 자는 비용은 물론 인건비와 생활비를 대대분 부담하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였습니다. 그리고 작품이 완성되어 성공적으로 납품이 이뤄지면 상응하는 사례비를 건네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그런 작품을 소유하거나 심지어 관람하는 것 조차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문화예술을 즐기기를 원했는지, 소득 수준이 일정 수준 이상이었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아니,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되는 거 아닌가?'라는 의문을 머리에 떠올리는 분들은 고개를 빨리 흔들어 그런 생각을 날려버리시기 바랍니다. 대영박물관,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며,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미술관으로 불리는 에르미타시 미술관 Эрмитаж(정식 명칭은 국립 에르미타시 박물관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Эрмита́ж이라고 하네요.)도 원래는 1764년 예카테리나 2세가 미술품을 수집하면서 만들어진 개인 전시관이었습니다. 100여 년 가까이 왕족과 일부 귀족들만이 그곳에 모아 놓은 예술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19세기말이 되어서야 일반에게도 작품들을 감상할 기회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개방된 당시에도 대부분 예술작품들은 왕족과 귀족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작품들을 모두 몰수해서 에르미타시에 모아두면서 미술관과 박물관으로서 명성이 커졌습니다. 무엇이 옳은 선택이고 정당한 행위인지는 견해가 서로 다를 수 있었지만, 공공미술관이 탄생하고 서민들이 부담 없이 명작들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방문해 볼 곳은 성옥기념관 聲玉紀念館입니다. 성옥문화재단 산하에 있는 문화예술공간으로, 고 이훈동 회장이 생전에 목포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당대 화가, 문인, 명창들과 깊이 교류하면서 수집한 것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는 예술품을 투자 목적이 아니라 지역 예술가들이 창작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후원한다는 생각으로 서예와 한국화 작품들을 꾸준히 구매했다고 전해집니다. 지역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 문화예술에 대한 남다른 안목을 가졌던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남도의 로렌초 데 메디치 Lorenzo de' Medici'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1400년대 이탈리아 피렌체를 이끌던 가문 메디치, 그중에서 로렌초 데 메디치는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와 같은 젊은 미술가들이 가진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이들을 꾸준히 후원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르네상스를 꽃피운 주인공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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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상식 1]

기념관 이름인 성옥聲玉은 고 이훈동이 가지고 있던 아호雅號로 진도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직접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구슬 같은 목소리라니 사업가에게 조금 어울리지 않는 호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훈동은 "내가 사업가가 아니었다면 소리꾼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소리에 진심이었던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진도로 가출했는데, 그를 뒤쫓아 간 어머니는 농사꾼들이 일하는 곳에서 소리를 하고 있는 아들 목소리를 듣고 그를 찾았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죽은 다음에 사람들이 노래로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며 음반을 녹음해서 남겼다고 하는데, 그가 부른 춘향가 중 쑥대머리는 전문 소리꾼들이 부른 완창을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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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옥기념관은 고 이훈동 나이 88세 미수米壽를 기리기 위해서 자녀들이 건립한 문화공간이라고 합니다. 2003년 공사를 시작해 2004년 9월 9일 개관했습니다. 기념관을 찾아가면 먼저 건물 위용에 조금 놀라게 됩니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을 모아놓은 작은 미술관 정도로 생각하고 가면 단단한 느낌을 주는 석조 건물이 다소 위압감을 주기도 합니다. 전체 규모는 높이 9미터, 대지 1,723평방미터, 739평방미터입니다. 건물 입구를 지나 좁은 계단으로 올라가면 건물 주인이었던 이훈동 흉상을 볼 수 있습니다. 건물 앞에는 아기자기한 정원과 별관인 이층 건물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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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상식 2]

성옥기념관에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주인이었던 이훈동 모습을 재현한 흉상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흉상 수준이 조금 남달라 보입니다. 제작자가 바로 한국 현대 조각 1세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김영중입니다. 그는 대형건물에 미술품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하는 '1%법'을 제안하고 제정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며, 세종문화회관 외벽에 있는 석부조 비천상을 만든 사람입니다. 전시관 내부에서도 그가 만든 예술작품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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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자리 잡고 있는 다른 건물들과 비교할 때 압도적인 위용을 보고 처음 드는 생각은 아마 그가 무엇을 해서 이런 부를 모았을까 라는 생각일 겁니다. 어린 시절 진도로 도망갈 정도였으니 살림이 그리 풍족하지는 않았을 터이니 말입니다. 그런 의문은 전시관 제1관에 들어가면 풀립니다. 그는 조선내화라는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내화벽돌을 만드는 회사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조선내화는 우리나라가 철강산업으로 성장을 이어갈 때 포항제철(지금의 포스코)을 비롯한 모든 제철소에 쇠를 녹이는 용광로를 만드는 재료가 되는 벽돌을 독점 공급하던 회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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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상식 3]

원래 조선내화주식회사는 1938년, 일본인들이 자본금 40만 엔을 들여 목포시 온금동, 즉 다순구미 앞에 건설한 것이 시초입니다. 내화연와를 주로 생산하던 시설로 해방과 함께 미군정에 귀속되었다가 이를 목포상공회의소 3~4대 회장을 지냈던 손용기가 매입했습니다. 이훈동은 당시 이사로 회사에 참여했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고 공장시설 80% 정도가 파괴되어 회생이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손용기가 이훈동에게 회사를 인수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넘겨받아 지금까지 사업이 번성하고 이어진 것입니다. 현재 처음 시작했던 목포공장은 폐쇄되었고, 포항과 광양 등 타 지역에 공장을 건립해 이전했습니다. 참고로 폐쇄되어 흉물처럼 남아있던 조선내화 목포공장은 2017년 국가등록문화재 제707호로 지정되어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하는 사업이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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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격적으로 예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등 다양한 도자기가 전시되어 있는 공간을 지나 산수화와 서예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향해봅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십곡 백납병 十曲 百衲屛'입니다. 정재 최우석, 월선 장우성을 비롯해 남농 허건, 운보 김기창까지 당대 최고 화가들 15명이 각각 2점씩 그림을 그려 한 폭에 세 점씩, 총 10폭 병풍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대가로 불리는 사람들이기에 그 모든 화가들이 그린 작품들을 하나로 모은 예술작품은 전무후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다음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산수 4인각인병'이었습니다. 남농 허건, 의재 허백련, 미산 허형, 소치 허련 등 남농화 4대가 각각 배산임수 지형을 상상해 그려 네 폭 병풍으로 만든 관념산수화 작품집입니다. 관념산수觀念山水란 실제 있는 것을 보고 그리는 진경산수 같은 것이 아니라, 작가가 상상만으로 산수화작품을 그리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조선 전기 화가 안견 安堅이 그린 '몽유도원도'가 있습니다. 목포와 진도 지역이 남농화로 유명하기 때문에 운림산방 같은 곳에 가면 다양하고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처럼 4대가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그려서 모은 작품은 만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성옥기념관에는 서예와 한국화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역 출신 젊은 예술가들이 만든 작품도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유명해지기 훨씬 이전부터 작품활동을 후원하며 초기작품들을 구매해 주었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박은선 작가 작품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대리석 산지로 유명한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에서 23년째 활동하며, ‘추상적 동양미’가 돋보이는 조각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조형예술가입니다. 전시장 내부에는 작은 작품이 있고, 기념관 정원에서는 거대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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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가면 너무 달달한 꿀팁! 1>

*박은선 작가가 만든 조형물들은 모두 회전합니다. 작은 작품이나 큰 작품이나 동일합니다. 예술작품에 손을 대는 것이 조심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가 만든 작품은 관람객이 손으로 회전시키며 관람할 수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정원에 있는 작품 '생성'도 거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힘을 주면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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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전시관 내부에는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유명 작가들이 만든 작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장고 내부에는 당장은 만나볼 수 없는 유명 작품 500여 점, 별도 저장 공간에 또 수백여 점이 잠들어 있다고 합니다. 다행히 정기적으로 작품들을 교체해서 전시하고 있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목포를 방문할 때마다 성옥기념관을 찾을 이유가 될 듯합니다.




성옥기념관 부지에는 사실 숨겨진 비경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로 꾸며져 보존되고 있는 일본식 정원인 이훈동정원입니다. 자료에 따라 설명이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지어져 현재까지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일본식 정원을 가진 저택으로 가장 크고 화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방 후 해남출신 국회의원 박기배가 소유했고, 그것을 이훈동이 구입해서 별세할 때까지 거주하며 계속 가꾸었다고 합니다. 한때 집과 정원이 너무 낡아서 새로 건축하려고 했는데, 당시 모시고 살던 어머니가 수리만 하고 살면 좋겠다고 해서 지금까지 예전과 비슷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일반인들도 토요일 오후에 무료로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정원에는 오래된 석탑도 9개 정도 있어 멋진 풍경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드라마 모래시계와 야인시대 등 과거 장면을 담아야 했던 드라마에서 촬영지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 관람객이 관람하다가 오래된 석탑을 밀어서 파괴하는 사고를 냈고, 그 이후에는 폐쇄하고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마 당분간, 아니 앞으로 오래도록 고즈넉하며 정갈하고 오래된 정원을 가까이서 즐길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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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가면 너무 달달한 꿀팁! 2>

*아름다운 이훈동정원을 관람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전혀 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노적봉공원 바로 아래에는 목포 원도심과 목포 앞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위에 노적봉예술공원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예술공원 별관 옆 정원 끝에 있는 전망대에서 오른쪽으로 내려다보면 이훈동 정원이 잘 보입니다. 그렇게나마 감춰진 비밀 정원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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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동정원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1930년대 일본에서 목포로 건너와 미곡무역상과 면화 사업으로 성공한 우치타니 만페이 内谷萬平가 만든 곳입니다. 그는 1904년 일본 효고에서 출생해 당시 조선으로 건너와 정착했던 사업가입니다. 일본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품질이 우수했던 호남미를 일본으로 수출하는 일로 큰돈을 벌었고, 목축회사와 목포제빙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면화사업과 미곡사업으로 호남지역 최대 갑부로 성장했고, 일본인 목포거류민회 의장과 목포부회 부의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막대한 자산가였던 그는 일본인 거류지역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대저택을 짓고 113여 종에 달하는 나무를 심어 식물원을 방불케 하는 정원을 꾸미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하고 그는 재산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피신해 가까스로 배를 빌려 타고 일본으로 탈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 성옥 이훈동은 막대한 부를 얻고나서 선택을 해야 했을 겁니다. 그 많은 재산으로 아름다운 집과 정원을 꾸미고 나서 더 많은 재산을 얻기 위해 사업을 꾸준히 확장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훈동정원을 처음 만들었던 우치타니 만페이 처럼 말입니다. 미곡수출에서 면화사업으로, 다시 목푹회사와 제빙회사를 건설해 사업을 끊임없이 확장해 나간 것처럼 어마어마한 거부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또 다른 길은 사업가로 성공한 부로 장학재단을 설립해 수 많은 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돕고, 가난한 예술가들을 불러들여 작품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든든한 후원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예술작품들을 모아서 시민들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이었습니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했던 로렌초 데 메디치 처럼 말입니다.


고 이훈동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다른 대기업들이 사업영역을 꾸준히 확장해 나갈 때 오히려 눈을 문화와 예술 그리고 지역인재 육성에 돌렸습니다. 비록 그가 키운 기업이 세계 최고 기업으로 성장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꾼 문화와 예술과 인재들은 세계 최고가 되어 대한민국 문화 중흥기를 이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옥기념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나 골동품들이 아니라 목포지역에서 르네상스가 꽃피기를 바랐던 원대한 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참고자료

문화재정 국가문화유산포털 www.heritage.go.kr

백주영, 선미옹호운동세력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정치학 석사논문, 2018.



[관람 정보]

[주소] 전라남도 목포시 영산로 11

[전화] 061-244-2527

[관람요금] 무료

[관람시간] 09:00~12:00, 13:00~17:00

*월요일, 공휴일, 명절은 휴관

[주차 정보] 전용 주차장 없습니다. 인근 공영주차장을 이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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