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도록 아름다운 노을섬
어스름을 뚫고 해를 토해해는 장면과 바다와 섬들이 해를 삼키는 장면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나요? 뭐 이상한 심리테스트는 아니니까 한 번 떠올려 보세요. 새해 첫날, 아직 어둑어둑한 숙소를 나서 눈을 비비며 산을 올라 '내 기어이 일출을 보리라' 다짐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기운이요 밝은 정기이니 그걸 채워야겠다는 뭐 신념 같은 것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해 잘못했던 것들을 되새기고 힘찬 미래를 기원하며, "보라, 저 뜨거운 태양. 눈부시게 타올라 세상을......." 같은 헌시 獻詩를 낭독하면 더욱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되겠죠. 저는 석양과 일몰을 즐기는 분파分派입니다. 아직 내게 남은 소원과 풀지 못한 갈등이 산적해 있는데 해는 속절없이 수평선 너머로 기울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는 부류입니다. 어차피 내일은 또 다른 태양이 떠오르겠지만, 우리에게는 오늘 하루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기회이자 운명이자 마지막 사랑 같은 존재였습니다. 다 이루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고, 다 하지 못한 말을 곱씹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이런 감동을 제쳐두고 그저 또다시 속절없이 떠오를 아침해를 즐기는 사람들은 우리 같은 이들이 보기에 하루하루 반성하지 않고 살아가는 어수룩한 사파邪派에 불과합니다.
오늘은 지난번에 이어 두 번째 고하도 이야기, 노을이 아름다운 고하도 高霞島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온 관광객들이 목포에 와서 노을을 즐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노적봉 언덕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절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지만) 통상 고하도와 외달도 사이로 서서히 해가 저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보이는 바다는 매우 잔잔하고 아름다우며, 드리운 노을을 은은하게 반사하는 수경 水鏡에 불과합니다. 고하도는 그 아름다운 풍경 한 자락을 차지하는 요소일 뿐입니다. 하지만 목포나 고하도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그 풍경은 어떻게 인식되었을까요. 특히 거친 바다를 상대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옛 뱃사람들에게는 고하도와 외달도 사이에서 점점 퍼져나가는 노을이 마냥 아름다울 수만은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1897년 개항 이후에는 또 다른 감정이 생겨났습니다.
1902년, 중국 청나라 개항장 중 하나였던 사시 沙市에서 일본영사로 근무하던 와카마츠 우사부로 若松兎三郞가 목포에 있던 일본영사관에 부임했습니다. 당시 일본제국은 면과 양모제품을 유럽 등지에 수출하면서 섬유제품 원료가 부족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북으로 길어 기후조건이 달랐던 조선에 남면북양정책 南棉北羊政策, 즉 남쪽에는 면화를 재배하게 하고 북쪽에는 양을 사육하도록 해서 저렴하게 원료를 수급하는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조선, 특히 목포 인근을 비롯한 호남지방에는 목화를 많이 기르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문익점 선생님 덕분이었죠. 당시 재배하던 목화는 아시아품종으로 섬유 가닥이 짧아 두터운 옷이나 솜을 만드는 데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제국이 원하던 것은 섬유로 가공하는데 용이한 면화였습니다. 그래서 와카마츠 우사부로는 1904년, 일본 농무성으로부터 섬유 가닥이 길게 나와 현대적인 면제품을 생산하기에 용이한 면화종자 13종을 들여와서 목포지역에서 시범생산을 시작했습니다. 그 대량 시범생산지가 바로 고하도였습니다.
결국 13종 품종 중에서 미국 버지니아산 조숙종이었던 육지면 陸地棉 Upland Cotton이 선택되었습니다. 토지와 기후에 적당한 것으로 판명되자 일제는 지역 농민들에게 강제로 면화를 재배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목포는 개항장으로 일본과 가까워 생산물을 운송하기에 편리한 데다 면화 시범재배 결과 생산 품질이 양호했기 때문에 일제는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농민들을 강제 동원해서 재배하도록 하고 강압적으로 싼 값에 수매해서 일본으로 보내면 일본 면방직 공업이 급격히 성장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 섰던 것입니다. 생산면적은 갈수록 증가해서 전라남도 서남부에서 생산한 면화가 국내 전체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0~40%에 달했다고 합니다.
목포지역 목화 재배면적도 급격하게 증가했고, 공출제도를 통해 가급적 모든 생산물을 수거해 갔습니다. 전국에서 거둬들인 목화는 목포항을 통해 일본으로 송출했습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목포항에는 일본으로 보내지는 목화가 늘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포라는 이름도 목화를 수출하는 항구에서 비롯되었다는 잘못된 전설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학자들은 당시 일본제국 정책을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있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미곡이나 목화나 모두 농민들이 재배한 것을 일제가 비용을 지불하고 수매한 것이 아니냐는 논리였습니다. 품종을 개량하고 재배를 장려하는 것도 정부 정책 중 하나인데, 농민들은 그러한 계획에 따라 재배면적을 넓히고 생산량을 증산하고, 정부는 그것을 일괄 수매하는 것이 뭐가 잘못된 것이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논리적인 결함이 매우 많습니다. 쌀은 우리나라에서 소비하기에도 부족했습니다. 1930년대에 이르면 전국에서 생산된 미곡량 중 50%가 넘는 것들이 일본으로 수출되었습니다. 말이 수출이지 탈취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한 수출로 돈을 번 사람들은 농민이 아닙니다. 한반도에 들어와서 미곡과 목화 중계상을 하던 업자들이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당시 목포 도심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최고급 주택, 지금 '이훈동정원'이라고 불리는 집과 정원을 만들어 거주하던 사람이 바로 미곡상이었습니다. 면화라고 달랐을까요? 일제는 한국에서 면작을 강요하기 위해 지극히 난폭한 방법을 동원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총독부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안이다 보니 헌병이나 순사들이 직접 나서서 농가들을 순찰했습니다. 면화를 재배하지 않고 보리나 콩을 심은 농가가 발견되면 작물들을 모두 발로 밟아 부러뜨리는 일이 흔했다고 합니다. 일본인의 강제적인 농사지도도 농민들을 힘들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발생했고, 나중에 일본인은 총이나 칼을 휴대하고 다니며 면화재배를 강요했습니다.
1936년, 육지면 재배에 성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면화장려 30년 기념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조선육지면발상지지'라는 비석을 시범재배에 성공했던 고하도에 세웠습니다. 이 비석은 고하도 이충무공 비각 옆에 두었다가 지금은 목포근대역사관 2관에 원본을 옮겨 전시하고 있습니다. 고하도에는 당시 경작지 부근에 목포 목화체험장을 조성해서 당시 역사와 목화재배 모습을 재현한 기록물들을 전시해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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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상식]
목화체험장에 가면 당시 조성했던 비석 모조본을 만들어서 세워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원형은 고하도 이충무공 비각 옆에 있음"이라고 설명이 함께 적혀있습니다. 최근에 발간된 목포역사 관련 서적에도 이충무공 유적지에 가면 그 비석을 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석을 어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육지면을 시범재배해서 성공한 것이 정말 그렇게 자랑스러운 역사인가, 그리고 그걸 기념해서 일제가 세운 비석을 그렇게 관광자원으로 자랑할 만한 것인가, 더구나 그런 비석을 이충무공 유적지에 세워놓아야 하는가 하는 논란들이었습니다. 토론 끝에 목포시가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을 목포근대역사관 2관으로 재조성 하면서 해당 비석은 수탈 역사를 기록한 전시물들과 함께 전시하기로 했습니다. 고하도에 있는 것은 복사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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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목화체험장은 처음 시험재배했던 장소 인근에 어린이들 학습을 위한 공간과 놀이터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 대부분은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생들 그리고 그들을 데려온 교사나 부모들입니다. 물론 목화가 무엇이고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 아이들에게 교육하는 것이 결코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육을 위한 전시관과 교육자료를 살펴보면 1363년 중국 원나라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와 우리나라 사람들도 솜옷을 입게 되었다는 아름다운 역사에 뒤를 이어 1904년 일본 영사 와카마츠 우사부로가 육지면(미국면)을 도입해서 목포 고하도에서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뒤 설명도 없이 말이죠. 당시 고통받으며 강제로 재배하고 모든 것을 헐값에 넘겨야 했던 농민들 고통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린이들이 전시물을 보고 잘못 이해한다면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개량 목화 품종을 들여와서 재배에 성공했고, 그로 인해서 목포 지역이 목화 주산지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듯합니다.
당시 고하도에는 목화를 시범재배 이후에도 20 가구가 본격적으로 목화를 생산하던 농민들이었습니다. 1900년대 초기 목포에 거주하던 일본인 가구가 266세대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적지 않은 가구였습니다. 특히 고하도 전체 면적과 거주 주민들 수를 생각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입니다. 당시 농민들은 멀리 외달도를 포함한 다도해 너머로 지는 노을을 바라볼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쟁기를 잠시 내려놓거나 목화에서 실을 뽑아내기 위해 돌리던 물레를 멈추고 멀리 하늘을 바라봤을 겁니다. 그저 해질녘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오늘도 난 고생 많았다, 내일도 힘내서 하루를 살아보자 라는 생각이었을까요? 마음으로 고하도 너머로 지는 노을을 다시 바라보겠습니다.
하루하루 삶에 지쳐서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은 때였을지도 모릅니다. 다 버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가고 싶은 때도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게 삶이고, 그게 인생이다"라고 순응하며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 멀리 지는 해,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고 변해가는 아름다운 하늘과 바다. 목화를 재배하던 농민들에게 그 높고 아름다운 고하도高霞島 노을은 고통받고 있는 현실을 견디게 만드는 작은 쉼이자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환상과도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하늘을 물들이는 것이 붉은 태양이 아니라 농민들 자신들이 흘린 피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지요. 고하도 목화체험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고 나서 눈을 들어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볼 때 아름답다는 생각 한쪽 구석에는 고난을 헤쳐나갔던 목화재배 농민들,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아픈 삶에 대한 기억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하도에 골프장을 만들고 국립호남권생물자원관과 연계해 섬 전체를 어린 학생들이 체험하며 배우는 학습장으로 만드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왜 이곳에 목화체험장이 있는지, 저 커다란 비석은 누가 왜 세웠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차근차근 알려주는 내용도 함께 포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자료
노대현, 목포산책, 광주, 전남대학교출판문화원, 2019.
최성환, 대한민국 도슨트 03 목포, 서울, 21세기북스, 2023.
최성환, 陸地棉 보급 후 일제강점기 목포항의 기능과 영향, 한국민족문화 74, 2020, pp. 281~322.
[관람 정보]
[주소] 전라남도 목포시 달동 고하도길 8
[전화] 061-461-3092
[관람료] 무료
[관람시간] 09:00~18:00
[주차 정보] 무료 전용주차장 있음.
<함께 보면 좋은 것들>
*섬 한복판에 국립호남권생물자원관이 있습니다. 규모가 크고 신기한 전시물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인근에 있는 목포신항에는 그 유명한 세월호가 녹슨 채 정박해 있습니다. 거대하고 조금은 흉물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아픔을 함께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하기에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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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가면 너무 달달한 꿀팁! 1>
*고하도로 가는 가장 재미있고 스릴 넘치는 방법은 바로 목포해상케이블카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목포해상케이블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3.23km),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철탑 기준 155m),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섬으로 왕복하는 노선입니다.
*유달산과 목포 전 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단, 도착해서 목화체험장과 이충무공 유적을 돌아보려면 다른 교통수단이 필요합니다.
*목포 해상케이블카 티켓은 성인 기준으로 제일 저렴한 것이 왕복 24,000원입니다. 조금 부담되는 가격인데요, 할인받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목포까지 타고 온 KTX 티켓을 제시하면 10%, 전국체전이나 수묵박람회 티켓, 전남사랑도민증을 제시하면 3,000원을 할인해 줍니다. 그리고 가톨릭성지를 방문하고 받은 스탬프와 석산과 대반동 카페 영수증을 가져와도 할인해 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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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가면 너무 달달한 꿀팁! 2>
*목화체험장 실내온실에는 다양한 커피 자판기와 넓은 공간 그리고 좌석도 많이 있습니다. 온실에서 재배하고 있는 목화를 보면서 잠시 쉴 수 있습니다.
*실외에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넓은 놀이터(!)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놀이기구 그룹이 두 개나 있으니, 자녀들과 나들이하기게 최적입니다.
*인근에 있는 국립호남생물자원관과 연계하면 교육효과가 크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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