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단어 2, 낯설다

by 라라라

‘낯설다’. ‘낯’이라는 단어는 얼굴, 체면, 다른 사람들을 대하기에 떳떳할 만한 도리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낮추어 “낯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가끔 벼룩 같은 작디작은 곤충도 그걸 가지고 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 ’낯‘에 아직 온전하거나 완벽한 정도에 이르지 않다는 의미를 띠고 있는 ’설다‘가 붙어 ‘낯설다’라는 단어가 됩니다. 완전하지 않다는 의미는 뭘까요? 설명이 조금 애매할 수 있어서 관련이 있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유추해 봅니다. ‘설다’와 함께 자주 쓰이는 단어로 ‘익다’가 있어요. “설다와 익다는 반대말 아닌가? 낯설다와 낯익다 처럼 말이야.” 음, 조금 많이 애매하게 이해하고 있군요.


‘익다’는 열매 같은 것이 거두기에 충분한 정도까지 성숙하거나, 열을 가해서 조리해 먹는 식재료에서 조리 화학반응이 충분히 일어나서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열매가 익는다는 것은 다른 동물들이 따먹기에 적당한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붙박이 식물들은 개체수를 더욱 늘리고 싶은 본능을 가지고 있지만 동물처럼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씨앗을 과육 속에 숨겨두고 호르몬을 분비해서 과육을 달콤하고 부드럽고 먹음직스럽게 만듭니다. 충분하게 익지 않은 ‘설익은’ 과육은 떫거나 시거나 딱딱하거나 색이 예쁘지 않아요. 화학적 성분도 달라서 ‘덜 익은’ 과육을 먹으면 맛도 없고 제대로 소화가 되지도 않아 탈이 나기도 해요. 까탈스러운 친구들은 과육을 만들지 않기도 해요. ‘우리들 번식은 우리가 직접 한다’는 고집스러운 녀석들입니다. 다 익을 때까지 가시가 촘촘히 달린 껍질로 씨앗을 감싸 보호하거나 티 나지 않게 숨겨두다가 적당한 시기가 되면 펑하고 터뜨리거나 가지에서 떨어뜨려서 씨앗을 땅에 심기도 해요. 하지만 우리는 그런 녀석들 씨앗을 맛나게 먹어 버립니다.


이번에는 식재료를 요리할 때 일어나는 조리 화학반응을 살펴볼까요? 조리 화학반응은 우리 선조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하여 실패하는 과정에서 발견해 낸 조금은 인위적인 것들입니다. 그분들이 어찌 이런 것들을 알아냈는지 신기하면서 감사하기도 합니다. 먼저 단백질 변성 protein denaturation이 있어요. 달걀흰자는 열을 가하기 전에는 투명하고 끈적한 액체 상태입니다. 그대로 먹어도 좋지요. 다른 식재료들과 잘 섞이고 독특한 질감을 보여주기도 해요. 하지만 열을 가해 단백질 구조가 변해서 응고되면서 하얗게 변해요. 그러면 모양을 잡기도 좋고 탱탱한 식감을 맛볼 수도 있어요. 우리가 사랑하는 마이야르 반응 maillard reaction도 있네요. 당과 아미노산이 일정 정도 이상 온도와 시간, 그러니까 충분한 열량을 흡수하면 갈색을 띤 딱딱한 형태가 됩니다. 고기나 빵을 구울 때 표면에 나타나요. 아! 오징어 게임으로 다시(!!) 세상에 돌아온 달고나(뽑기)는 캐러멜화 caramelization가 일어나서 만들어져요. 요리할 때는 양파가 갈색으로 변하면서 달달한 맛과 향을 가진 마법에서 나타나요. 개인적으로 전분 호화 gelatinization of Starch 현상을 좋아해요. 감자나 고구마를 삶으면 전분이 수분을 흡수하면서 팽창하고, 부드럽고 끈적끈적한 젤리 같이 되거든요. 식감도 좋아지지만 단맛도 훨씬 높아져요.


그런데 요리 말고 얼굴 ‘낯’은 왜 설거나 익을까요? 그 얼굴이 설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각들로 접할 때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하게 비유하자면 이렇겠네요.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작은 마을. 그래서 대충 누가 어디 살고 뭐 하고 지내는지 알 정도로 빠삭한 동네. 눈 감고도 산책을 다닐 수 있을 만큼 거기가 거기인 길거리. 모두 나를 잘 알고, 나도 모두를 대충은 다 아는 공동체. 모두 ‘낯익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바깥에서 그 속으로 누군가 들어와요. 그러다 마주치지요. 처음 만나는 누군가는 ‘낯선’ 사람이 됩니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은 경계심을, 다른 이는 호기심을 가지게 됩니다. 생물학적 본능으로 설명하자면 내게 이로운가 해로운가를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한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아닌 ‘다른‘ 존재는 대체로 고통과 불행을 함께 가져온다고 여겨졌어요. 보통 낯선 존재들은 우리가 가진 것들을 탐하는 약탈자였고, 알 수 없는 병을 옮겨 가족을 죽게 만드는 보균자였고, 우리가 합의하고 지켜온 윤리를 무시하는 무법자였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반대로 그들은 유전적 다양성을 가져와 우리 종족을 더욱 강하고 번성하게 만드는 정보 전달자이기도 했어요. 그때 필요한 것은 적절한 열량(사람과 사람 사이니까 ‘온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입니다. 따뜻하게 낯선 존재를 공동체 안으로 품어주면 되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너무 높은 온도와 짧은 시간은 관계를 망칠 수 있어요. 겉만 익고 속은 아직 설익은 요리처럼 말이에요. 서서히 성질이 변하고 속까지 열기가 충분히 전달되면 우리는 그런 사람과 우리 사이에 형성된 관계를 ‘낯익다’고 해요.




낯선 곳, 처음 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해야 하는 새로운 일. 이런 요소들은 어떤 이들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는 것들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게 커다란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뭐랄까…….. 그저 늘 맞닥뜨려야 하는 일상일 뿐입니다. 그 중간 어디쯤 애매한 지점에 서있는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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