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 포레스트, 2024
"가축 대신 생각들을 끌고 방랑하는 중이다." - p.12
저는 어린 시절부터 항상 방랑을 꿈꿨습니다. 지금까지 변함없이 말이죠. 좁고 초라하고 갑갑한 이곳만 아니라면 어디든지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몸을 누이는 공간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늘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내가 처한 환경보다 더 나은 다른 곳이 있다는 정보나 확신 같은 것이 있을 리는 만무했지만 말이죠. 어찌 보면 그냥 새로운 것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아니, 정확히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내 몸과 영혼에 늘 새로운 자극을 주고 싶었습니다. 금방 싫증을 내는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냥 냅다 깊게 파고들었습니다. 늘 일정한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책이 그랬고, 음악이 그랬고, 영화가 그랬고, 가슴 아프게도 사랑이 그랬습니다. 미안합니다, 당신.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이 방랑이었는지 모릅니다. 유목민이나 집시들은 자신들이 소유권을 주장할만한 공간이나 힘이 없었습니다. 한 곳에서 머물다가 지력地力이 다하거나 계절이 상해버려 더 이상 가축을 충분히 먹일 수 없게 되면 다른 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다행히 떠돌이 유랑민들에게 야박하지 않은 동네를 만나면 생각보다 오래 머물 수 있었습니다. 떠나온 곳에서 챙겨 온 장신구나 도구들을 새로운 이웃들에게 선물하며 환심을 사면 타박하는 눈초리가 누그러진다는 것을 배웠고 또 그걸 잘 이용해 먹었습니다. 그래도 가축은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무리가 삶을 지속하기 위한 중요한 자산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것들을 잃게 된다면 안타깝게도 선량한 유목민에서 약탈을 일삼는 기마족이 될 수밖에 없었거든요.
저는 가축이 없습니다. (한때 반려동물이 있었지만 짝을 찾아서 떠나갔습니다.) 기나긴 방랑인생 여정에서 제가 끌고 다닌 것은 남들이 빼앗아 갈 수 없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생각이란 녀석은 잊지 않고 들여다 봐 주는 것만으로 잘 자라고 잘 지냅니다. 물론 먹잇감이 없으면 서운하겠죠. 그 녀석은 고약한 식습관이 있는데, 전에 한 번 주었던 사료는 잘 안 먹는다는 것입니다. 같은 재료를 사용한 것을 줄 수밖에 없다면 소량이라도 다른 것들을 섞어주며 달래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반복되면 효과가 없더라고요. 새로운 맛 츄르를 찾아다니는 제 모습이 영락없는 노예 같습니다. 제가 생각을 하는 것인지, 생각이 저를 움직이는 것인지 모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늘 새로운 사랑을 찾는 제 모습에 대한 변명은 아닙니다.
"나의 경우 독서란 잠시 숨을 고르는 것과 같다." - p.82.
니체가 부럽습니다. 독서를 하면서 쉴 수 있다니 말입니다. 제 생각이란 녀석은 단 한 줄 문장을 던져주어도 너무나도 게걸스럽고 소란스럽게 먹어댑니다. 그리고 이번 것은 단백질이 풍부하니 만족스럽다거나 다음에는 더 몸(생각이란 녀석에게 몸이 있다니!!! 아, 그게 난가?!)에 좋은 것을 찾아오라고 윽박을 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면 항상 전쟁 같습니다.
학교에 갇혀서 밖에 나오지 못하고 살던 시절, 저는 도서관을 자주 찾을 수밖에 없었어요. 거기 말고는 먹잇감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없었으니까요. 시간이 부족할 때는 그냥 서가 앞에서 책을 꺼내 들고 그대로 읽어 나가기도 했습니다. 문체가 아니라 줄거리 위주였던 작품들은 점심 먹으러 가기 전에 잠시 짬을 내는 것만으로도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세어보니 한 해에 대출한 도서가 300권이 넘더라고요. 그래서 사서분이 그렇게 저를 반기셨나 봐요.
기억납니다. 톨킨 선생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반지의 제왕이 재출간되었던 때 도서관에서 1권을 읽었습니다. 제 생각 그놈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더라고요. 이런 걸 어디서 구했냐고 칭찬도 들었습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금방 끝내고 2권이 언제 들어오냐고 사서분께 물어보니 조금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랬고 생각 그 녀석도 그 시간을 차분히 기다릴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몸에 이어서 생각에게 성격도 있다니. 음? 성격은 결국 내 육체보다 생각에 가까운 거였나? 내 성격이 아니고 생각이 그 모양 그 꼴이었나 봅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네요.) 주말에 외출 기회가 주어지자 서점으로 달려가 2권을 사서 읽고 도서관에 기증했습니다. 3권도 같았지요. 도서관에는 책에 기증자 이름을 써넣을 수 있는 네모난 틀을 찍어주는 도장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니체는 책을 읽을 때 숨을 고르지만, 제게는 좋은 책을 읽고 나면 당분간 숨을 고를 여유가 주어집니다. 책을 내려 놓으니 이제 조금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당신 보고 싶어요. 우리 새로운 사랑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