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리드미컬하게 두 손을 포개어 가슴을 눌러주는 고사리같은 손입니다. 올해 7살이 된 둘째 아들입니다. 유치원에서 심폐소생술을 배웠다면서 엄마에게 해주겠다고 합니다.
"무조건 심폐소생술을 하면 안돼. 자는 사람일 수도 있어. 꼭 확인해야 해. 두 손을 이렇게 하면 안돼, 그렇게 하면 갈비뼈가 부러져. 우리 몸의 심장은 작아서 이렇게 두 손을 겹쳐서 눌러줘야 해! 몸을 90퍼센트로 하고 누르는거야!"
유치원에서 설명들은 내용을 조잘조잘 말해주면서, 두 손을 넓게 붙여보이기도 하고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90도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아서 90퍼센트라고 설명하는 모습도 정말 귀여웠습니다.
"축구선수는 응급차가 오기 전에 심폐소생술을 해서 살아났고, 야구선수는 그냥 기다려서 죽었데"
경기를 하다가 심장이 정지한 운동 선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옆에서 잠옷을 갈아 입던 첫째 딸이 무슨 이야기냐며 다시 말해달라고 합니다. 바스락 거리는 옷감 소리에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입니다. 두 아이는 다시 재잘재잘 이야기를 이어나갑니다.
"어푸~ 어푸~ 수영을 합니다. 갑자기 파도가 다가옵니다. 으악, 물에 빠졌어요. 꽤꼬닥!"
아들의 주문에 다시 한번 물에 빠져 정신을 잃은 시늉을 합니다. 아이는 다시 심폐소생술 놀이를 시작합니다. 이봐요, 이봐요, 내 목소리 들리나요? 안들리는 척 대답을 하지 않고 계속 누워있으니, 아이의 부드러운 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고양이 꾹꾹이처럼 사랑스러움이 가득 담긴 손짓입니다.
"엄마 오래오래 사세요"
심폐소생술을 마친 아들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합니다. 죽다가 살아난 사람 역할을 해서일까요. 평소보다 더 많은 감동이 뭉클뭉클 솟아오릅니다. 두 아이는 저의 인생을 항상 심폐소생해줍니다. 그렇게 새로워진 내 모습은 매번 나다움에 한 발자욱씩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두 아이와 함께 하는 현재의 내 모습이 가장 나다운 모습이며, 미래에도 더욱 나다워질 것입니다.
# 두 아이와의 만남이 진정한 나다움을 찾아나서는 출발점이 되다
'두 아이의 엄마' 지금은 제법 친숙해진 이름표입니다. 9살 딸 아이는 몸도 마음도 부쩍 자라서, 가끔은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막내라고 '우리 애기~'라고 불러서인지, 7살 아들은 여전히 아기처럼 사랑스럽습니다. 남편과는 서른이 넘어서 만나고 결혼을 했습니다. 꽤 오래전 남편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아이들을 잘 돌볼 줄은 몰랐다"고 말입니다. 결혼 전 서울 소재의 공기업에 다니면서 '까칠한 도시녀'로 보였던 제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완전히 달라졌다는 겁니다.
두 아이 육아는 저에게 많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서른 전, 아니 출산 전까지도 어린 아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지만, 엄마가 되고 나서 내 안에 이렇게나 많은 사랑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던 아이의 소리와 몸짓을 알아듣기 위해 애썼고, 이 과정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몇 년동안 반복되면서 두 아이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이는 태도가 익숙해졌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나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태어난 '나다움 상자'에서 그것을 꺼내어 씁니다. 때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나다움'이 꺼내어지곤 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하겠지만, 이내 익숙해질 겁니다. 그것 역시 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두 아이를 돌보면서 '타인에 대한 관심'이라는 나다움이 자연스럽게 꺼내졌습니다. 이전에는 오로지 내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던 사람이었기에, 나다움 상자에서 꺼낼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나다움 상자의 밑바닥이 보일 정도로 본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겁니다. 그러기에는 진정한 나다움을 찾아가는 고된 여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두 아이의 만남이 이 여정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 두 아이의 엄마로서 강하고, 당당해져야 한다
나다움 상자에서 꺼내어진 또 다른 나다움은 '내 자신을 믿기'입니다. 저는 소심한 성격을 가진 노력쟁이입니다. 성실하지만 주목할만한 성과는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끈임없이 노력하는 습관이 있어서 무슨 일이든지 못한다는 말을 듣지 않았지만, 잘한다는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원하는 성과를 내지 못했기에, 내 자신을 진심으로 소중하게 대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고, 왠만큼 참아 줄 수 있는 불쾌한 언행들은 못 들은 척 지나쳤습니다. 컵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도, 너무 차가울까봐 냉수가 아닌 정수나 온수를 넣는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괜히 분위기를 망칠까봐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만 지키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를 키우면서 제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엄마로서 강해져야했고 당당해져야 했습니다. 나에게 향하는 불쾌한 언행은 참아줄 수 있었지만, 아이들을 향한 무례한 행동에는 반드시 따져 물어야했습니다. 간혹 아이들이 어리다고 예의없이 대하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어른인 저에게 할 말을 옆에 있던 아이에게 쏘아붙이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상대방의 잘못을 분명하게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판단 기준에 대한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나아가 내 자신을 믿고 행동해야 했습니다. 나의 행동이 경박한 싸움이 아니라, 품격을 갖춘 정당한 행동이 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책을 읽고 사색하면서 내 인생의 철학을 만들어 갔습니다. 두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내 자신을 믿어야 했습니다.
내 자신을 믿기 시작하면서, 자존감이 높아지고 마음근육이 강해졌습니다.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지 않은 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어"라고 말합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온전히 두 아이에게 집중하는 동안 타인의 시선에 둔감해지는 경험이 반복되었습니다. 엄마에게는 전전긍긍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기 때문에, 그냥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 아이와 함께 성장하기 = 나다움을 찾는 여정
부모가 되면 누구나 한번씩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바로 '부모가 먼저 성숙해지고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로서 성숙해지는 과정은 진정한 나를 찾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을 통해서 나다움을 알아 갑니다. '나다움 상자'속에 손을 넣는 것은 행복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어느날인가는 집안일에 너무 지쳐서 식탁에 앉아 울어버렸습니다. 두 아이가 놀라서 다가왔습니다. 딸아이는 엄마를 안아주고 토닥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휴지를 가져다가 엄마의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각자 생각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엄마의 마음을 감싸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둘째가 갑자기 엄마의 손을 잡아 끌었습니다. 자신의 배꼽에 닿게 하고서는, "엄마! 이렇게 하면 에너지가 충전되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얼마 전 아이들과 함께 탯줄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둘째는 그 때 이야기를 떠올렸나 봅니다. 엄마의 배꼽에서 아기의 배꼽으로 에너지가 전달되듯이, 자신의 배꼽에서 엄마의 배꼽으로 에너지를 주려고 했던 겁니다. 엄마의 한 손을 꼭 쥐고 자신의 배꼽에 대고 있는 둘째의 체온이 느껴졌습니다. 정말로 내 몸안에 에너지가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두 아이의 엄마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이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구나하는 행복함이 느껴지면서 다시 힘이 솟았습니다.
잠시 뒤 둘째가 "엄마 이번에는 오른 손으로 하자"라며 나머지 한 손을 자신의 배꼽에 대었습니다. 양 손을 통해 행복과 사랑이 흘러들어왔습니다. 40대에 들어서면서 부쩍 체력이 힘들게 느껴지는 데는, 그동안 가끔이라도 해왔던 운동을 그만 둔 이유도 있습니다. 두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기운 넘치는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올 해의 새로운 반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운동과 체력 관리에 힘써야 겠다고 계획을 세워봅니다. '나다움 상자'속에 고이 넣어둔 '운동을 좋아하는 나'를 다시 꺼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나다움 상자'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떤 '나다움'을 꺼내볼까요? (Photo by Kelli McClintock on Unsplash)
# 인생의 끝에서 가장 나다움이 무엇일지가 궁금하다
저는 지금도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무언가를 만나고 싶습니다. 아직 나다움이 담긴 상자를 모두 비워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새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했고, 익숙해졌습니다. 아, 이게 진짜 내모습이구나. 나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새로운 질문과 답변으로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나다움의 끄트머리가 손에 잡히면 용기를 내어 시도해야했고, 그것을 놓쳐버린 순간에도 주저하지 않고 다시 새로운 나다움을 꺼내야했습니다.
문득 친정 엄마가 떠오릅니다. 거의 구순이 되신 외할머니는 몇 년전부터 치매 증상을 보이고 계십니다. 친정 엄마는 그런 외할머니를 요양원으로 보낼 수 없다시며 집에서 돌보고 계십니다. 치매환자와 함께 생활하는 일은 마음고생이 심합니다. 그래도 친정 엄마는 사람은 자기 팔자대로 사는거라며, 외할머니를 모시고 사는게 엄마의 팔자라고 합니다. 돌이켜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묵묵히 버티고 어려움을 이겨내는 모습이 바로 친정 엄마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나이와 경험에 따라서 나를 나답게 하는 무엇가가 계속 변해간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친정 엄마의 나이가 되었을 때, 외할머니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내 인생에서 끝까지 부여잡고 있을 나다움은 무엇일지 궁금해집니다. 두 아이는 엄마를 떠올릴 때 어떤 모습을 가장 엄마답다고 느낄까요. 남편은 어떤 모습이 가장 아내답다고 느낄까요. 그리고 내 자신은 무엇이 가장 나답다고 생각하게 될까요. 저는 지금도 나다움을 알아가기 위해 두 아이와 함께 행복한, 때로는 고된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