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침부터 하늘이 흐렸다. 샬럿타운 날씨 정보에는 비가 예보되고 있었다. 며칠 전 낮에 아주 살짝 비가 흩날린적이 있었지만, 이토록 하늘부터 흐려지면서 비가 올 조짐을 보이는 날은 처음이었다. 캐나다 PEI 샬럿타운에 도착한 이후 첫 비오는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비 오는 날을 뜨거운 커피가 더욱 끌린다. 게다가 달콤한 향기의 도넛과 함께라니! 지나칠 수가 없다. 샬럿타운에는 관광객을 위한 안내소가 한 곳 있다. 안내소 건물에 들어가면 데스크의 직원들이 보이고, 그 옆으로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각종 안내 책자가 비치되어 있어서, PEI지도와 공연 정보, 먹을거리 정보 등을 얻는데 유용하다. 특히 이곳은 시원하고 물통이 있다면 물도 리필할 수 있어서, 주변을 지나다니다가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안내소 건물 안에는 푸드코트가 있는데, 도너츠, 베이크드 포테이토, 샴페인을 시작으로 몇 가지 먹을거리를 팔고 있다. 그중 가장 먼저 보이는 곳이 도너츠 판매점이다. 달큼한 향기가 건물의 문을 열자마자 코를 자극한다. 저기 도넛을 먹어봐야지, 생각과 달리 매번 배부르게 밥을 먹고 이곳을 방문했던지라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샬럿타운에서 만난 첫 비가 내리던 날, 바람과 비가 섞여서 우산을 어느 방향으로 해도 비를 온전히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와 아이들은 우산을 요리조리 휘두르며 안내소 건물로 걸어갔다. 굳이 이런 날씨에 외출을 감행한 이유는 히포버스를 타기 위해서이다. 예약해둔 시간은 오전 10시, 일기예보에는 9시부터 10시까지 비가 내린 후 개다가 오후에 다시 비가 내린다고 했다. 하루종일 비가 오는게 아니니 혹시라도 히포버스를 탈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안고 빗속을 천천히 걸었다.
바깥은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내소까지 걸어오면서 의외로 우산을 쓴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점퍼를 입고 모자를 쓰고 걸어가는 사람들, 유모차를 밀고 우산없이 걸어가는 사람까지, 많은 사람들이 우산없이 걸어다녔다. 안내소 건물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비가 그친건가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우산없이 지나다녔다. 관광객이라서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을까, 생각하다가 이렇게 사방팔방에서 불어오는 비와 바람에는 차라리 우산없이 걷는게 편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 우리는 히포버스를 타지 못했다. 날씨때문에 운행할 수 없어서 예약했던 사람들에게 환불처리를 했다고 한다. 안내소 건물안 쉼터에 앉아 아이들은 지도에 그동안 다녔던 장소를 표기하며 놀았다. 상점들이 문을 여는 열시가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달달한 도넛 향기가 풍겨왔다. 잔뜩 기대했던 히포버스에 대한 아쉬움이 도넛 한입에 달곰하게 녹아버린다.
도넛 가게에는 다양한 모양의 도넛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각기 다른 세 가지 맛을 골라서 함께 먹자고 했다. 하지만 두 아이 모두 '쿠키 몬스터' 도넛에 시선이 꽂혔다. 가운데 구멍이 뚫린 동그란 도넛 위에 파랑색이 입혀져 있었고 눈알이 두 개 달려있는 몬스터였는데, 가운데 구멍안에는 쿠키 반 조각을 물고 있었다. 아이들이 정말 좋아할 모양새였다. 나는 가장 달콤해보이는 갸라멜이 잔뜩 올려진 '카라멜 애플' 도넛을 골랐다. 두 개의 쿠키 몬스터와 한 개의 카라멜 애플 도넛을 각각 종이 접시에 담아서 조심조심 근처 테이블로 옮겼다.
캐나다 PEI 샬럿타운에 와서 돈을 내고 커피를 사먹은 적이 없다. 한국과 비슷한 커피가격인데도 왠지 나 혼자만을 위해 돈을 사용하기가 불편했다. 하지만 오늘은 비가 내린다. 그것도 이곳에서의 첫 비가. 게다가 도넛이 눈 앞에 있다. 커피를 구매할 핑계가 충분했다. 도넛 한 입과 커피 한 모금의 감미로운 조화를 기대하며, 드디어 샬럿타운에서 첫 커피를 구매했다.
쌉싸름한 커피 향기, 입속이 데일 것 같은 뜨거운 온도, 뚜껑을 열고 살짝 살짝 맛보는 갓 추출된 커피. 핫 커피의 매력은 점원으로부터 건네받은 순간부터 몇 분동안 최고로 고조된다. 아, 커피는 이 맛이지. 창밖의 비를 바라보며 커피와 도넛을 음미했다. 광고영상을 보면 어떤 음식을 한 입 베어물면 주변이 환상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나의 기분이 꼭 그랬다.
캐나다 PEI 샬럿타운에 도착한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비를 핑계삼아 첫 커피를 구매했다. 커피애호가인 나는 그동안 어떻게 커피를 즐겼을까? 환승때문에 하룻밤 묶었던 토론토 호텔에서는 객실에 구비되어 있던 커피 티백을 마셨다. 샬럿타운에 도착해서는 에어비앤비 숙소에 구비되어 있던 커피머신을 이용했다. 호스트 헤더는 커피 이외에도 애플시나몬, 레몬녹차, 카모마일 등 다양한 티백을 구비해주었다. 시차적응을 위해서 차 티백을 즐기며 커피는 아주 가끔 마셨다.
나는 갓 추출된 고온의 커피 맛과 향을 즐기는 사람이었나보다. 이곳 샬럿타운에서 찾아낸 나의 커피 취향이다. 도넛 가게에서 구매한 커피는 이내 식기 시작했고 점점 미적지근해졌다. 맛도 점차 사라졌다. 적당히 식어서 충분히 맛을 식별할 정도가 된 커피는 이런, 밍밍했다. 숙소에서 내려마시던 커피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샬럿타운에 온 직후에는 밤낮이 뒤바뀌어서 시차적응을 위해 카페인을 멀리했다. 2주차인 지금은 뒤바뀐 밤낮에 완벽히 적응한터라 커피가 자꾸만 당긴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숙소에서 라떼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커피머신에 넣는 커피가루와 물의 양을 조절해보기도 한다. 한국에서 가져온 커피티백을 꺼내려다가 다시 캐리어에 넣어둔다.
그런데 이날 도넛 가게에서 밍밍한 커피를 맛있게 먹은 경험을 하고 나니, 신기하게도 숙소의 밍밍한 커피가 맛있게 느껴진다. 나의 혀가 타협점을 찾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비가 오지 않는데도, 달큰한 도넛이 없는데도, 이곳 샬럿타운 도서관 안에 있는 커피숍의 커피가 나를 유혹한다. 그래, 도넛 가게 커피는 커피전문점이 아니었으니 맛이 없었을 거야. 저곳은 전문커피숍이니 다르지 않을까. 맛있는 커피를 마셔보고 싶어, 도서관 내 커피숍을 전문점이라 할 수 있을까, 온갖 대화가 머릿속에서 오고간다. 데일리 브루, 아메리카노, 화이트 플랫, 마끼야토 등 열가지 가까운 커피 메뉴가 있는 걸 보니 전문점이 맞는 것 같다. 게다가 저 머신들과 바리스타의 아우라까지. 이렇게 이곳에서 커피를 주문해야할 이유가 늘고 있다. 이 글을 마치면 지갑을 챙겨서 저곳으로 향하는 나를 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