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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단 Sep 19. 2022

글을 짓고 밥을 지었다

착각이었다, 그건.


나는 내가 무척이나 생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밥을 짓고, 그렇지 않을 때는 글을 지었다. 무언가를 생산하지 않는 삶은 얼마나 지루할까, 하고 생각했다. 시간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 시간을 나에게 주세요, 하고 싶어졌다. 


환갑이 훌쩍 넘은 친정 엄마는 지금도 여전히 쉬지 않고 종일 일하신다. 바깥 일을 가실 때는 그로 인해 바쁘고, 일이 없을 때는 집안일을 하시느라 바쁘다. 일이 없는 날은 집에 앉아 편안히 쉬셔도 좋을텐데 계속 서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다. 오랜만에 친정집에 갔지만 밤이 되어 잠자리에 눕기 전까지 엄마와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는다. 그런 엄마를 보고 자라서인지 나는 가만히 쉬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괜히 죄를 짓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나는 내가 무척이나 생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착각이었다. 나의 믿음을 지탱해주던 한 가지 습관은 새벽기상이었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는 오전 서너시간 동안 혼자 있을 수 있지만, 집안일을 하고 나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오후에는 두 아이를 데리고 여기 저기 다니면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아이들이 잠든 이후 시간을 활용하는 게 가장 집중하기에 좋다. 게다가 아이들과 함께 아홉시 전후로 잠이 들기 때문에 새벽 두 세시가 되면 눈이 떠진다. 그이후로 아이들이 깨는 시간까지 나만의 꿀같은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새벽기상은 무척 달콤하고 뿌듯했다. 


하지만 새벽기상을 하지 않은 지 한달이 넘어가는 듯하다. 새벽에 눈을 뜨기는 하지만 다시 눈을 감고 누워있을 때가 많다. 얕은 잠과 공상을 반복하며 아침이 밝아오길 기다린다. 언젠가 박경리 선생님의 글에서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쓸 때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눈을 뜨고 그대로 누워있을 때가 많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박경리 선생님이 칠순이 넘으셨을 때의 기록으로 기억한다. 아직 사십대인 나는 왜 벌써 이러고 있는 걸까. 일 분 일 초 지나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어쩔 줄 모르던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 내가 하지 않고 뭉개고 있는 일들을 떠올려 본다. 빨간머리 앤 전집을 함께 읽고 있는 모임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제 5권을 시작할 때이다. 추석 지나고 시작하자고 공지한 뒤로 지금까지 시작을 하지 않고 있다. 미안합니다, 동..님. 흥..님. 네이버 블로그 인플루언서가 되고 나서는 도서 협찬을 받곤 한다. 2주 안에 서평을 올리는 일정이 관례인데, 처음으로 독촉 이메일을 받았다. 지난주까지 올리겠다고 했는데, 아직 안올렸다. 미안합니다, 출판사님. 이밖에도 하나가 더 있는데 그건 생략해야겠다. 브런치에 쓴 글을 엮어서 브런치북으로 발행하려는 계획도 계속 미뤄지고 있다. 미안해, 나 자신. 


지인 중에 나의 네이버 블로그를 봐주는 분이 있는데 며칠 전 이렇게 연락이 왔다. "요즘 블로그에 글이 안보이던데 다른 흥미로운 일들이 생기신거에요?" 나의 대답은 이랬다. "아니오, 게을러져서요." 게을러진 동안 나는 소비하는 삶의 즐거움을 느껴버렸다. 나태하게 소비하는 시간의 편안함, 흘러가는데로 조금은 무기력하게 놔두는 시간 속에서 느끼는 홀가분함. 애써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고도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지나갈 수 있다니. 그냥 가만히 앉고 누워만 있어도 시간은 지나갔다. 


게으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의외로 우리집은 더욱 깨끗해졌다. 거실의 서재에서 읽지 않는 책을 골라서 처분했다. 옷장에서 철지난 작은 옷을 꺼내어 버렸다.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골라서 버렸다. 어찌보면 청결함을 생산해 낸 시간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무엇인가를 버리는, 소비의 시간들이었다. 나에게 생산이란 글을 쓰거나 어떤 기능을 익히거나 하는 '남기는' 일들이다. 


하루 종일 소비만 하는 사람들은 심심해서 어찌 살까하는 의문을 풀어버린 한 달여 동안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오늘은 아침부터 바람이 무척 세차다. 아, 어제밤부터 그랬다. 그 전날은 밤새 열대야로 에어컨을 틀어야 했다. 백로가 지났으니 밤 기온이 뚝 떨어져야 정상인데 때늦은 늦더위가 밤낮으로 찾아왔다. 기상청 발표로는 9월에 폭염주의보가 발령된 건 11년 만이라고 한다. 결혼한지 11년만에 소비의 즐거움에 빠지고 게으름 주의보가 발령된 나의 상황이 맞물린다. 폭염주의보때문인가, 라는 핑계는 겸연쩍다. 


바람부는 아침에 오랜만에 타로카드를 꺼냈다.  내려놓을 것과 집중해야하는 것을 생각하며 두 장의 카드를 뽑았다. 펜타클 9번과 완드 1번이 나왔다. 




결과를 간략히 해석하자면 이렇다. 현재의 여유, 혼자 있음을 버려라. 초심으로 돌아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라. 다른 사람이 벌어다주는 돈을 쓰는 데 집중하지 말고, 창의성을 발휘하여 직접 돈을 벌 기회를 마련하고 도전하라. 이토록 명확한 신호를 보여주다니. 뭉개고 있는 일들을 꺼내야겠다. 하나 하나 펼치고 먼지를 툴툴 털어서 제자리를 찾아 곱게 놔주어야겠다. 소비의 시간을 접고, 생산적인 일들을 시작해야겠다. 글을 짓고, 밥을 지어야겠다. 밥을 지을 돈도 벌어야겠다. 완즈 1번 카드의 토끼처럼 뛰어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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