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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단 Oct 01. 2022

모자이크와 무지개의 나라, 캐나다

오늘도 샬럿타운 도서관을 찾았다. 코르따도 대신 플랫 화이트를 주문하고 창가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창문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넓은, 건물 외벽을 투명한 창으로 만든 것이었다. 넓은 창은 연달아 이어져 있어서 마치 대형 스크린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세로로 얇은 창틀을 의식하지 않으면 외국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한 무리의 자전거가 오더니 주차를 한다. 헬멧을 벗으니 백발의 할머니가 보였다. 중년의 남녀와 어린 여자 아이가 함께 있는 걸 보니 삼대가 모인 가족인 듯 했다. 겨우 열 살 정도 되어보이는 여자 아이는 헬멧을 벗고 야무진 손으로 무릎의 보호대를 벗겨냈다. 아, 이런 모습!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다.


도서관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 본다. 다양한 머리 색과 피부 색을 가진 사람들이 좌로 우로 지나간다. 나시부터 긴소매까지 각양각색의 옷차림이다. 길 건너편 건물을 바라보다가 입 안에 달콤한 침이 고인다. 앤 오브 그린게이블즈 기념품 가게의 알록달록한 지붕은 그곳에서 파는 빨강, 노랑, 초록, 검정으로 색이 입혀진 사탕을 떠올리게 한다.


캐나다 문화에 대한 책을 읽어본 사람은 알록달록한 '모자이크'로 색이 입혀진 캐나다 국기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다문화주의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현재 캐나다에는 원주민과 유럽계 백인을 비롯해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등 다양한 인종이 거주하고 있다. '모자이크'가 되기 이전의 캐나다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이 오랜 기간 계속 되었다. 원주민들도 프랑스편과 영국편으로 나뉘어 서로 다투었다. 결국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캐나다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빨강머리앤의 고향인 프린스 에드워드를 포함한 동부지역에 살던 프랑스인들은 강제로 추방당했다.


전쟁의 승자가 패자를 지배하는 방식은 일반인들에게는 '편견'으로 작동한다. 빨강머리앤 소설이 시작되면 린드 부인은 마차를 타고 가는 매튜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 한다. 머릴러는 린드 부인에게 농장에서 일할 남자 아이를 데리러 갔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게다가 일꾼을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 머리나쁜 팔푼이 프랑스 소년들밖에 없잖아요."


소설 빨강머리앤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잉글랜드를 포함하는 영국계 캐나다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프랑스인들은 일꾼으로 고용되는데 대부분 멍청하다. 다이애나의 엄마인 베리 부인은 앤과 다이애나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데, 앤이 실수로 포도주를 다이애나에게 먹였기 때문이다. 슬픔의 날이 계속되던 어느날 당황스런 표정의 다이애나가 앤을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샬럿타운에 가셨고 아무도 의사선생님을 부르러 갈 사람이 없어. 미니 메이가 위독한데 메리 조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거야. 앤, 나는 무서워 견딜 수 없어." 아기를 돌보는 메리 조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이다. 앤은 미니 메이를 간호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메리를 나무랄 생각은 없지만 상상력이 있었다면 좀더 빨리 알아차렸을 거야." 메리의 무능함을 꼬집는 문장이다. 이렇게 앤의 시대까지도 프랑스계 사람들에 대한 무시와 편견이 만연했다.


오늘날 '모자이크'가 된 캐나다의 모습은 어떨까? 적어도 표면적으로 프랑스계 사람들에 대한 무시와 편견은 사라졌다. 더 나아가 아시아, 아프리카 등 그곳에 살고 있는 다양한 인종의 문화를 존중하는 다문화주의를 표방한다. 그뿐이 아니다. 캐나다는 동성애 등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관대한 나라이다. '모자이크'와 '무지개'로 표현될 수 있는 나라이다.




샬럿타운에 도착하던 날, 곳곳에서 '무지개' 깃발을 볼 수 있었다. 큰 아이가 먼저 발견하고 가리키며 말했다. "엄마, 무지개 깃발이야!" 플로팅 푸드 코트 앞 2층 상점에는 캐나다 국기와 무지개 깃발이 번갈아 가며 빼곡히 꽃혀 있었다. 다운타운 거리에서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품에서도, 무지개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큰 아이가 다시 말했다. "엄마, 여기 사람들은 무지개를 정말 좋아하나봐!"


무지개? 무지개하면 떠오르는 상징이 있다. 동성애, 퀴어 축제같은 단어들이다. 이곳 지역 신문에서 발견한 정보로는, 7월 말 샬럿타운에서 프라이드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다. 많은 무지개 깃발이 달려 있던 이유였다. 페스티벌이 열린다고 공지된 토요일에 아이들과 숙소 근처에서 놀고 있었다. 무지개 깃발을 꽂고 달리는 차, 무지개색 크록스를 신은 사람, 무지개색 넓은 숄을 걸치고 걸어가는 사람, 무지개 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걷는 사람들이 어디론가 바쁘게 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8월에도 샬럿타운 곳곳에서 무지개를 볼 수 있었다. 캐나다와 미국 등 몇몇 국가에서는 6월 한달을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로 기념하고 축제를 연다. 캐나다 토론토에서도 큰 규모의 페스티벌이 열린다고 한다. 샬럿타운에서도 6월부터 8월까지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것이리라.




도서관 내 커피숍에서 만든 플랫 화이트는 상당히 맛이 있다. 하지만 양이 적다. 조금씩 아껴 마시면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노트북으로 글을 쓴다. 길 건너편 'Shoppersdrugmart'에는 여전히 무지개가 그려진 포스터가 붙어 있을 것이다. 도서관 앞을 오고 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언제나 활기차서 신선한 기분이 느껴진다.


사람의 시선은 앞을 보고 있어도 양 옆이 살짝 보이게 된다. 노트북을 보며 글을 쓰는 나의 양 옆 시선에 '빨강색'이 들어왔다. 여자 세 명이 수다떠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빨강색'이 자꾸 신경 쓰인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다. 결국 고개를 돌려 세 명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하! 빨강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금발의 여자가 의자가 아닌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앉은 높낮이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그녀가 앉은 바닥은 천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무지개가 그려져 있었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상징하는 무지개, 프라이드 먼스는 양성애자인 뉴욕 운동가 브렌다 하워드의 애칭인 '긍지의 어머니(Mother of Pride)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매년 프라이드 먼스가 되면 축제가 열리고, 기업에서는 프라이드 에디션 상품을 선보인다. 무지개를 모티브로 한 애플 워치 밴드를 본 적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프라이드 먼스는 LGBTQ(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퀴어)의 특정한 성적 취향을 옹호하는 의미를 넘어서 성 평등을 강조한다. 이성애외의 성적 취향에 가해지는 폭력이 부당하다고 외치는 표현이다. 그래서 LGBTQ 취향이 아닌 사람도 프라이드 먼스 축제를 함께 즐긴다. 사회에서 성소수자를 억압하는 방식, 나아가 사회가 개인을 억압하는 폭력을 반대하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축제에 참여한다.


도서관 바닥에 앉은 '빨강색' 그녀는 앞 소파에 앉은 두 명의 여자들과 즐겁게 대화를 했다. 도서관 직원인듯한 남자가 물건을 어깨에 이고 지나가다가 멈춰 서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직원을 바라보며 유쾌하게 대답을 했다. 직원이 내가 앉은 테이블과 그녀들의 테이블 사이에 멈춰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엇? 다른 두 여자들에 비해 음색이 독특하게 느껴지기는 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타고난 성이 남성으로 보였지만, 빨강색 원피스를 입고 긴 금발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샬럿타운 도서관에서 나와 왼쪽으로 조금 걸으면 컨페더레이션 아트센터와 유명한 카우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는 교차로가 있다. 그곳의 횡단보도는 무지개로 색이 칠해져 있다. 횡단보도를 걷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애자일 것이다. 무지개 깃발이 달린 상점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들 역시 그럴 것이다. 하지만 6월을 지나 8월까지 보이는 무지개에 삿대질을 하거나 불만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없다. 12월 한겨울에도 횡단보도와 상점의 깃발은 여전히 무지개로 물들어 있을 것 같다.


소설에서 그린게이블즈에 온 11살 앤은 25살에 길버트와 결혼하고 7명의 자녀를 낳고 기른다. 1차 세계대전을 겪고 할머니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참전했던 첫째 아들 젬은 1918년에 섬으로 돌아왔고, 막내딸 릴러의 약혼자 캔은 다음해에 돌아왔다. 젬과 릴러, 그리고 앤의 자녀들이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세대를 거듭한다. 소설 속 인물이 실재한다면 2022년인 현재는 앤의 증손자녀가 그들의 자녀와 함께 살고 있을 것이다.


앤의 자손들은 캐나다 퀘백 주에서 프랑스어가 공용어로 인정되는 과정을 지켜봤을 것이다. 앤과 머릴러 시대 사람들이 당연시 했던 프랑스인에 대한 편견을 더이상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캐번디쉬 해변에서 만난 백인 남자 아이는 영어가 서툰 우리에게 불어를 사용하느냐고 물었다. 앤의 증손자녀의 아이들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캐나다에 영어와 불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음을 알고 있는 아이는 커감에 따라 원주민, 다른 국가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인식하고 존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샬럿타운 상점에서는 모든 제품에 영어와 불어가 함께 표기되어 있다. 감자칩 과자 한 봉지에도, 바베큐 소스 한 통에도, 영국계와 프랑스계의 오랜 대립과 화해의 역사가 씌여 있다.


여전히 머릴러 시대에 머물고 있는 나의 앤은 이번 여행을 통해서 새로운 캐나다의 모습을 알게 되었나 보다. "아, 프랑스계 사람들을 무시하던 나의 태도는 어리석었어요. 각 나라의 문화가 존중되는 모자이크 캐나다, 성소수자의 권리도 인정하는 무지개 캐나다는 정말 멋져요. 나는 핑크빛을 아주 좋아해요. 핑크빛은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빛깔이죠. 하지만 빨강머리를 한 사람이 핑크빛 옷을 입는다는 건 상상의 세계에서도 무리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의 캐나다에서는 빨강머리도 핑크빛 옷을 입을 수 있지 않을까요? "


이럴 때 나의 앤은 영락없이 열한 살 순수한 소녀의 모습이다. 어느때는 마흔의 중년으로 내게 말을 건네기도 하는데, 어떤 모습의 앤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아름다운 자연과 지금의 알록달록한 캐나다 문화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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