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 꽃길, 낙엽길, 인생의 모든 길

[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by 온단
20210218_061735.jpg 숫자 4 꽃다발


"꽃길만 길이던가

낙엽길도 곱기만 하다"


지난가을, 공모전에 제출했던 문구입니다. 결과는 낙선. 이런 공모전에서는 희망적이고 밝은 글귀를 적어야 하지만, 왠지 모를 오기가 생겨서 낙엽길이 곱다고 주장하고 싶었습니다. 꽃길만 걸으세요~ 사람들이 다들 꽃길만 바라볼 때, 낙엽길도 아름답고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의 30대 시작은 기쁘고, 흥분되고, 기대감으로 가득 찼었습니다. 드디어 서른,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나이로 느껴졌고 벅찬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40대의 시작은 우울했습니다. 특히 39살의 저는 우울감에 무척 시달렸습니다.


39살의 나는 왜 그토록 우울했을까요.


30대에 접어들면서 결혼을 하고 곧이어 두 아이 출산과 육아를 경험했습니다. 아이들을 돌보느라 행복하고 힘든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곧 40대에 들어서는 나 자신이 있었습니다. 나의 30대는 어디로 간 걸까. 육아에만 바쳐진 나의 30대에 나 자신이 없었습니다.


두 아이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내가 도대체 왜 우울한지, 그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나이 듦이 느껴져서가 아니었고, 30대가 송두리째 날아가버린 허무한 기분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순간에 나 자신이 존재해야, 그 시간을 오롯이 살아낸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출산과 육아의 기간은 철저히 나 자신의 욕구를 절제하며 모든 순간을 아이들에게 맞추어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주 가끔은 나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 잠시의 시간마저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행복한 감정, 그 반대편에는 풀리지 않는 피로감이 쌓여갔습니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이 허락되지 않은 채 계속 쌓여간 피로감으로 급기야는 극심한 우울감에 빠지게 된 겁니다. 아주 조금의 시간이면 되었을 텐데, 그때는 그 시간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요.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머릿속에서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30대의 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아니라 온전히 나 자신인 모습이 말이지요. 그때 그 허무했던 기분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너무나 기뻐서 흥분되기까지 한 30대의 시작, 그리고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훅 지나가버린 30대의 시간들, 제대로 오르지도 못했는데 이제 내리막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이 40이 다가오면서 몸에서 노화의 증거들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렇게 지독한 우울감에 빠져들었습니다.


39살의 우울감을 이겨내고, 올해 41살이 되었습니다. 두 아이는 제법 자라서 예전처럼 엄마손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어느 날인가는 문득, 이런 시간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벅찬 감정을 느끼기도 합니다. 두 아이의 엄마 혹은 아내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는 이런 시간들이 정말 귀하고 감사합니다.


40대에 들어서면서 이제는 꽃길이 아니라 낙엽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7년여의 경력단절 기간을 지나 말단으로 다시 시작하는 직장 생활도 '정상궤도'는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직장에서 '정상궤도'를 돌며 꽃길을 걷는 건 2-30대에 입사한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똑같이 열심히 일을 해도 주변인이 될 수밖에 없는 나의 처지가 속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낙엽길도 역시 아름답다는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직장에서도 '그들'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나아가 기준이 하나가 아니라, '그들' 각자와 '나'가 모두 개별적인 기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심-주변의 관계가 아니라, 각자가 모두 자신이 기준이 된 중심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꽃길도 존중받아야 하고 낙엽길도 존중받아야 합니다. 꽃길도 아름답고 낙엽길도 아름답거든요.


40대가 되니 인간적인 깨달음이 늘어갑니다. 나이 듦의 즐거움이 시작되는 듯합니다. 활짝 핀 꽃들이 다른 꽃을 시샘하거나, 스스로를 못마땅히 여겨 속상해할 때, 옆에서 토닥여주는 여유가 생깁니다. 40대는 저물어가는 낙엽길이 시작되는 나이인 줄 알았는데,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낙엽길의 시작이었습니다.





인생의 모든 길이 계획된 것이고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 있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심판]입니다.


책에서 주인공인 아나톨 피숑은 사망한 뒤 천국에 도착합니다. 그는 심판에 따라 천국에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시 태어나야 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충분히 살아내고 완성한 사람만이 천국에 남아 있을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다시 태어나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심판]에서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자신의 부모를 선택할 수 있고, 자신이 겪을 삶의 고난과 행복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폭력적인 부모를 선택하거나, 희생하는 삶을 선택하는 이유는 그런 삶이 훨씬 평가가 높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을 충실히 살아냈을 때 천국에 남게 될 확률이 높아지는 거죠. 예를 들어 천국에서 판사를 하고 있는 가브리엘은 과거에 사자에게 물려서 죽은 순교자였습니다.


[심판]의 세계관에 의하면, 이번 생애에서 내가 겪고 있는 꽃길과 낙엽길은 이전 생애의 죽음 후 천국에서 내가 선택한 셈입니다. 꽃길이든 낙엽길이든 인생의 모든 길은 모두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지금 나에게 생겨나는 모든 일들이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무슨 일이든 내 인생에 꼭 필요한 일들이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노심초사하지도 않고 기다리는 여유가 조금씩 생겨갑니다. 이 또한 40대가 되면서 생긴 좋은 변화입니다.



심판.jpg 베르나르 베르베르,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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