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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단 Jan 02. 2022

새해 첫 날, 미리 쓰는 사직서

세상이 그렇게 넓다는데, 제가 한번 가보지요.

<사직서>

개인 사유로 사직을 하고자 합니다

2022년 1월 1일. 북토로.



너무 간략한 사직서일까? 그만두는 마당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싶다. 호랑이해 첫날, 사직서를 미리 적어본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사직서를 사용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내용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직서를 내밀 용기가 부족해서 그렇다.  



世界那幺大, 我想去看看.

세상이 그렇게 넓다는데, 제가 한번 가보지요.



중국의 한 교사가 사직서에 썼다는 문장인데, 시진핑이 국제회의 개막식에서 인용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안정된 직장을 두고, 큰 세상으로 나아가겠다는 포부가 담긴 사직서. 누가 봐도 정말 멋지다. 그런데 나는 이제 저런 포부를 꿈꾸는 게 망설여진다.



낯선 외국생활을 떠올리면 기대감에 두근거렸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낯섬이 조금 피곤하다. 그저 F4의 유성우를 들으며, 예전 중국 생활의 감정을 떠올리는 게 몸도 마음도 편하다. 코로나가 주춤해지면 두 아이를 데리고, 외국에 나가볼 계획이다. 이것 역시 설렘보다는 타지에서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엄마의 일로 느껴진다.



마흔둘, 나이가 너무 많은가 싶다가도, 밀라논나 선생님을 보면 나이를 탓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작년에(라고 썼지만 불과 일주일 전) 육아휴직을 연장하러 회사에 다녀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최종기한까지 한꺼번에 연장을 했다. 막상 복귀해야 하는 날짜가 결정되고 나니, 사직서가 떠올랐다. 마음속에서만 쓰고 말 사직서. 복권에 당첨된 사람도, 백만 부 소설의 작가도, 회사는 그대로 다닌다던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을 떠올린다. 회사는 계속 다녀야지.



사직서를 내지 않으리라는 사실과 함께 회사 업무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도 인정해야겠다. 정말로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해야 한다는 풍문에 기대어 본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애사심이 치솟고 있었다. 나를 기다려주는 회사, 얼마나 든든한가. 게다가 남들이 가고 싶어서 줄을 서는 공기업 아니던가. 나 역시 서류 작성, NCS 시험 준비, 면접까지 얼마나 노력해서 입사한 곳이던가.



아이들을 키우며 돈을 벌기에 이만한 직장이 없다. 그런데 돈벌이 이외에 나에게 어떤 가치를 주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혹시나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하여 굳이 설명하자면, 나는 돈을 받으면 응당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직서를 운운해도, 막상 업무를 맡으면 책임감 있게 임한다. 어디서든 '값어치 있는 사람'이 되는 건 자존심이 걸린 문제니까. 특히나 돈을 받고 하는 일은 더욱.



다시 투덜거림으로 돌아가서, 이곳이 나에게 어떤 가치인가를 계속 생각해본다. 정년까지 일할 수 있다는 안정감, 함께 일하며 대화 나눌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또 무엇? 몇 년 전, 1인 출판사를 등록하고 회사에 겸업 신청서를 제출했다. 결과는 불허. 공기업은 공무원에 준하는 의무조항이 있고, 겸업금지가 철저하다. 당시에 나의 근무시간은 하루 4시간이었다. 소위 단시간 근무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 8시간을 근로한다. 그런데 나는 하루 4시간을 근무했었다. 사실 바로 이 점이 지금의 회사에 지원한 이유이기도 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었다. 입사원서를 제출할 때부터, 의아하기는 했다. 8시간 근무 체계 안에서, 4시간 근무하는 게 가능한가? 가능하니까 사람을 뽑는 거겠지 하는 순진한 생각, 혹은 모른 척을 했다. 일단은 나에게 짧은 시간 일자리가 필요했기에, 애써 스스로를 설득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도 4시간의 짧은 근무가, 아이들을 돌보는데 유리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8시간 근무하는 상황에서 절반을 일하는 건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었다. 4시간만큼의 월급을 받으면서도, 4시간'밖에' 일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회사 업무를 절반으로 배정받는 것도 아니어서, 4시간 동안 노동강도가 매우 높았다. 화장실을 한 번만 가고 4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일하기도 했다. 그렇게 진을 빼고 퇴근을 하면, 주차장 차 안에서 잠시 쉰다는 게 한 시간이 훌쩍 지나곤 했다. 그래도 끝나지 않는 일을 끝내보겠다고, 새벽 6시에 출근해서 유치원이 끝나는 4시까지 일해보기도 했다.  새벽 출근을 위해서는 어린 두 아이를 근처에 사는 시어머니 댁에 맡겨야 했기에, 전날 저녁에 다 같이 시댁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새벽에 조용히 혼자 일어나 출근을 했다. 그러기를 일주일, 겨우 밀린 일을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일은 계속 쌓여갔다. 4시간 근무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맡은 업무를 끝내지 못하는 사람이 돼버린 나는 자존감이 바닥까지 내려갔다.



몇 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힘듬이 느껴진다. 그때 너무 절박하게 진을 빼면서 일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하루 6시간 근무로 변경을 했고, 그때보다 힘들지 않게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아이들이 하교한 뒤에 혼자 두지 않고 싶은 마음은 근무시간을 늘리는 걸 반대했지만, 결국 시간을 연장하는 쪽을 선택했다. 여전히 '2시간을 일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맡은 업무를 처리하지 못해 바닥을 기었던 자존감은 회복될  있었다.



물론 짧은 시간을 일하는 사람만 힘듬을 겪는 건 아니다. 하루 8시간을 일하는 사람도 진을 뺄 만큼 힘들게 일하기도 한다. 이 글은 근로 시간에 따라서 누가 더 힘들고 아니냐를 따지려는 목적이 아님을 밝힌다.



세상은 정말 넓다, 회사 밖으로 나가고자 한다면 길이 얼마나 많을지. 하지만 낯선 길보다, 앞날이 훤히 보이는 회사 안에서의 길이 더 안전하게 느껴진다. 정년까지 매달 통장에 쌓일 월급을 생각하며, 다른 낯선 길을 엿보지 않기로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곳에서 나는 여전히 일하는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다. 무급 초과근무로 (유급이라고 하더라도) 부족한 시간을 메울 생각이 없으니, 정년까지 쭈욱 부족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리라. 두 아이를 키우는 데는 돈이 많이 든다. 모아 놓은 돈도 없으니 이대로 쭈욱 정년까지 회사를 다녀보기로 한다. 인정에의 욕구가, 회사 밖에서 실현될 여지가 보인다면? 경제적 욕구와 인정에의 욕구가 모두 실현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나는 그 길을 놓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길이 보이지 않기에, 그냥 이곳에 그대로 머물 수밖에. 호랑이해 첫날 적은 사직서는 나만 아는 이야기로 묻힐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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