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엄마에게 어떤 의미일까?
먹여주어야 하고, 돌봐주어야 하고, 또 돌봐주어야 하고, 또 돌봐주어야 하고... 끝없는 돌봄의 대상일 것 같은 때가 있었다. 중간에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두 아이 모두 5살까지 집에서 육아를 했다. 둘째가 신생아였을때 두 살 터울인 첫째는 한창 에너지 넘치게 걸어다닐 시기였다. 그래서 남편이 거의 매일같이 첫째를 데리고 바깥 나들이를 했다. 두 아이가 모두 외출이 가능했던 시기를 지나, 첫째가 5살이 되어 유치원에 입학했다. 나는 여전히 둘째를 데리고 매일 외출을 했다. 주로 공원이나 실외 놀이터처럼 야외로 데리고 나갔고, 여름에는 갈아입을 옷을 가방에 잔뜩 넣어서 물놀이 놀이터로 향했다.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육아휴직을 시작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는 아이의 간식을 챙겨주고 축구클럽에 픽업을 해준다. 한시간 반정도를 기다렸다가, 신나게 축구를 끝내고 오는 둘째를 차에 태운다. 그리고 근처 운동장으로 출발한다. 그곳에서 아이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거나 축구공을 찬다. 엄마에게 축구공 킥하는 방법을 알려주며 해보라고 하는데, 공을 발로 차본게 얼마만인지! 아들 덕분에 축구공도 차본다. 차 트렁크에는 항상 축구공, 인라인 스케이트, 돗자리, 배드민턴 라켓 등 다양한 도구들이 가득하다.
둘째와 오후 시간을 보내는 동안, 첫째는 학교 활동으로 바쁘다. 저녁이 되어서야 만날 수 있다. 혼자서 척척 알아서 일과를 챙기는 첫째를 보며 고맙고 대견하다. 둘째도 곧 그렇게 하겠지 싶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두 아이는 여전히 엄마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빈도도 낮아지고, 돌봄의 유형도 달라졌다.
예전의 돌봄은 밥먹이기, 옷갈아입히기 같은 원초적인 것들이었다면, 요즘의 돌봄은 정서적으로 지지해주기, 혼자 못하는 일들을 도와주기 등의 좀더 고차원적인 것들이다. 키도 쑥쑥 커서 주방 싱크대와 가스렌지 높이가 부담스럽지 않게 된 아이들. 마음도 제법 커져서 이제는 어른과 대화하는 기분이 들때도 있다.
그래서 어떤 순간은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동지애가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는 아이대로의 삶의 고충이 있고, 엄마는 엄마대로의 삶의 고충이 있다. 서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하다보면, 언제 이만큼 자랐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슬며시 엄마의 속상한 이야기를 건네보기도 한다. 아이가 이해하고 받아주리란 기대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찬찬히 엄마를 위로해주는 아이의 말이 훅 가슴에 들어오면, 뭉클해지고 만다.
십년 정도의 인생을 살아온 두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은 넓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도 분명히 인간의 희로애락이 있다. 아이들은 자신의 경험이 닿는 만큼 애써서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한다. 나는 아직도 두 아이의 얼굴에서 아기때의 모습을 본다. 너무나 작아서 만지는 손길마저도 조심스러웠던 그 모습. 어느새 훌쩍 자라서 어른처럼 이야기하는 아이들. 벌써부터 이렇게 동지애가 느껴지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큰 힘이 될런지. 아기때의 사랑스러움과 또 다른 종류의 사랑스러움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