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임진아 작가님의 <(사물에게) 배웁니다> 일상 에세이를 읽고 나서, 잔상이 가시지 않는 상황에서 쓴 글이다. 자꾸만 주변의 사물들이 말을 걸어와서, 그중 볼펜과 나눈 대화를 옮겨 본다.
평소에 삼색 볼펜을 즐겨 사용한다. 하나만 가방에 넣어 다녀도 든든한 기분이다. 하지만 거의 항상 검은색만 사용하게 된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럴듯하다. 이틀 전 다이어리를 쓰다가, 검은색 심의 잉크가 똑 떨어졌다. 그다음으로 무난한 색인 파란색으로 이어서 쓰고 마무리를 했다. 어제는 아예 파란색으로 도배를 했다. 다른 검정 볼펜들이 있지만, 0.3mm의 젤 펜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파란색으로 손글씨를 쓰고 있는 중이다.
검정, 빨강, 파랑. 볼펜이 말을 건넨다. 너의 인생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검은색 감정은 무엇이냐고. 검은색.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색이다. 검은색의 첫 느낌은 평온함이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느끼는 평온함. 최근 나의 인생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혹은 그러길 바라는) 감정이다.
평온함으로 무료해지지 않도록 해주는 파란색은 즐거움이다. 희망이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내 인생에서 희망은 성취보다는 실패에 가까웠던 단어라서, 대신에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졌다. 파랑파랑 한 소소한 즐거움. 한꺼번에 과다 분비되었다가 사라지는 엔도르핀보다, 매일 적당히 샘솟는 엔도르핀이 편안하다.
삼색 볼펜 중에서 빨강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손글씨는 주로 일기나 메모를 쓴다. 그래서 수험 공부할 때처럼 빨간색으로 시선을 집중시켜야 하는 문장이 거의 없다. 검은색 사이에서 갑자기 긴장감을 상승시키는 빨간색이 불편하기도 하다. 대신에 분홍이나 보라 볼펜을 구입해야겠다고 계획한다.
샤프펜슬보다는 연필을 사용하고, 연필보다는 볼펜을 사용하는 편이다. 필기구마다 질감이나 굵기가 다르다. 볼펜 역시 저마다 다른 느낌을 준다. 나는 얇고 부드럽게 연속으로 필기할 수 있는 볼펜이 좋다. 같은 볼펜도 어떤 날은 하얀색이 섞여서 나온다. 중간에 심이 흐려져서 그렇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심의 잉크가 떨어지기 직전에 그러하다. 매끄럽게 잘 써지는 날은, 종이 한 장 가득 손글씨를 써도 수월하다. 하지만 자꾸 끊기는 날에는 글쓰기를 중단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볼펜아, 너의 상태가 나의 글쓰기에 이렇게도 영향을 주는구나. 볼펜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된다.
곧 나의 생일이 다가온다. 생일 선물로 파버카스텔 만년필, 볼펜, 연필, 지우개, 그리고 컨트롤 9 오리진 롤 필통을 검색해보고 있다. 생일 때마다 특별히 갖고 싶은 선물이 없었는데 마흔두 살이 되는 올해는 내 손에 촤르르 감기는 필기구를 갖고 싶어졌다. 최근 손글씨를 쓰는 일이 많아져서, 손의 피로감을 줄이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본다. 볼펜이 나에게 말을 걸어서, 볼펜이 인생같이 느껴져서라는 핑계도 더해본다.
만년필이 볼펜보다 손의 피로도를 낮춰준다는 걸 어디선가 읽었다. 그래서 만년필을 찾기 시작한 게 생일 선물 세트를 알아보게 된 계기이다. 그것도 파버카스텔 브랜드로. 만년필로 유명한 다른 브랜드들도 많은데 왜 파버카스텔이냐고 묻는다면, 일 년 전쯤 아이들과 함께 참여했던 비엔날레 행사에서 파버카스텔 녹색 볼펜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고 답하고 싶다. 그냥 그때부터 파버카스텔 필기구가 갖고 싶어졌다. 차에 놓아둔 녹색 볼펜이 계속해서 말을 걸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볼펜에 대해 열심히 쓰고 있는 지금, 눈앞의 모래시계가 말을 건넨다. 오늘은 집중이 잘 되나 봐? 바쁘지 않은 거야? 글을 써야 하는데 집중이 잘 안 되거나, 시간 여유가 없는 날은 모래시계를 거꾸로 뒤집어 놓고 시작한다. 30분짜리 모래시계, 30분마다 분량을 체크하며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모래시계가 자꾸만 말을 건넨다. 이제는 (모래시계)에게 배웁니다를 적어야 할 때인가 보다. 왠지 사물에 대한 글을 앞으로 또 쓰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