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캐스터 집을 살 때까지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았다. ‘삼복정’ 식당을 헐 값에 팔며 판매대금의 일부를 7년 상환조건으로 팔았는데, 부모님은 그 돈을 매달 내게 주셨다. 그 돈이 끝나자 내 월급만으로는 집 융자금과 생활비를 다 감당할 수가 없었다. 매달 돈이 부족했다.
자본주의 신용사회는 돈 없는 사람에게는 매우 냉혹한 곳이다. 수입이 넉넉한 사람에게는 크레딧을 마구 내주고 막상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은행 문턱이 높다. 내가 미국에 와서 맨 처음 장만한 것은 턴테이블이 달린 전축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라디오 쉑’이라는 가게에서 월부로 샀다. 직장생활을 하며 은행계좌를 열고, 차를 사서 매달 할부금을 잘 갚아가니 여기저기서 신용카드를 내주었다. 집까지 사고 나니 신용 한도액도 마구 늘려 주었다. 미국의 신용카드는 몇 년씩 장기간 갚을 수 있다. 물론 이자가 붙는다.
부족한 돈을 신용카드로 메꾸었다. 쓰는 만큼 갚지 못하니 빚이 늘어 갔다. 결국 크레딧이 바닥이 나고 말았다. 밀린 빚을 갚고 다시 신용을 쌓기까지 한 동안 돈 고생을 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아이들에게 많이 미안하다. 방학이 되어도 남들처럼 여행을 가지도 못했고, 풍족히 먹이고 입히지도 못했다. 쿠폰을 오려 장을 보고 할인해서 파는 물건을 골라서 사는 습관도 모두 그때 익힌 것이다.
랭커스터 집을 판 후, 월세를 얻어 밸리로 이사를 나왔다. 샌디에이고로 이사를 가는 집주인과 내가 집을 비워주어야 하는 날짜가 겹쳐 1주일가량을 한 집에서 두 집이 살았다. 나보다 몇 살 나이가 많았던 집주인은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목사며 의사였다. 그의 아내는 간호사였고, 그는 목사였는데, 아내가 설득을 해서 한국에 나가 의과대학을 마치고 미국에 다시 들어와 시험을 보고 의사가 된 사람이었다. 그가 한국에서 의과대학을 다니는 동안 아내가 아이 셋을 키우며 그의 학비와 생활비를 모두 감당했다고 한다.
그의 꿈은 의료 사목이었지만, 고생한 아내에게 보답하기 위해 잠시 사목의 꿈은 접어두고 샌디에이고에 개업을 하게 되어 집은 세를 주고 이사를 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 집에서 10여 년을 살았다. 부동산 불경기가 시작되어 2년 연속 월세를 깎아 살다가 부동산 붐이 일자 다시 월세가 올라가기도 했다. 다행히 초, 중, 고교가 모두 아이들이 걸어 다닐만한 거리에 있어 등하교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둘째와 셋째는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동생 ‘세미’를 큰길 건너까지 데려다주고 등교를 했다.
그 집에 살며 ‘노스릿지’ 지진을 맞았다. 마침 공휴일 새벽이었는데,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 진앙지였다. 아파트 건물이 내려앉고, 주자창이 무너졌으며, 화재도 발생하여, 70여 명이나 죽었다. 내가 전에 살았던 랭캐스터에서 밸리로 나오는 고속도로의 고가 구간은 일부가 절단되어 새벽에 출근하던 오토바이 경관이 떨어져 죽기도 했다.
세미가 내 침대 곁 바닥에서 자고 있었는데, 아이와 멀지 않은 곳에 TV 가 떨어졌다. 냉장고, 책장, 옷장 등이 모두 넘어져 집안은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벤추라에 사시던 부모님이 달려오셔 집안 정리를 도와주셨다. 하루 종일 여진이 계속되었다.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있는 물이나 불과 달리 여진은 기습적으로 예상치 못한 때 온다. 그때 심정은 당장 비행기를 타고 멀리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욕실 벽이 일부 금이 가고, 변기가 깨어지고, 온수보일러의 연통이 망가졌다. 거주 불가 판정을 받은 아파트 주민들은 (미국의 아파트는 대부분이 월세다) 정부 보조금을 받아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집주인들은 정부 보조금과 저금리로 융자를 받아 집을 수리했다. 단독주택에 세를 들어 살 던 사람들에게는 별 혜택이 주어지지 않았다.
집주인 ‘백 목사’는 최소한의 수리만 해 주었다. 나는 행여 집을 비우라고 할까 봐 제대로 불평도 하지 못했다. 집에는 욕실이 두 개 있었는데, 지진 이후 하나만 쓰게 되었고, 그나마도 세월이 가며 금이 갔던 벽의 타일이 떨어져 나중에는 다용도 테이프를 붙여야 했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왜 내 이야기에 아내는 등장하지 않는가 하는 궁금증을 가질 것이다. 시기적으로 아직 아내가 등장할 순서가 아니다. 그녀를 만나 재혼을 하려면 10여 년의 이야기가 더 남아있다.
내 아이들을 낳은 사람과 왜 헤어졌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쓰기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혼의 책임이 절반은 내게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 나는 화가 많고 까칠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