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WCIR 이 되어서 했던 일은 산재근로자에게 진료와 보상을 해 주는 일이었다. 주 거래처는 의사와 병원이었다. 한국에서는 의사가 있는 곳을 병원이라고 하고 작은 동네 병원에도 환자가 입원할 수 있는 시설이 있지만 미국은 조금 다르다. 미국의 병원은 종합병원이다. 의사 사무실에는 간단한 진료를 할 수 있는 시설만 있고 입원시설은 없다. 클리닉 (clinic)이라고 해서 한국의 의원에 해당하는 곳에 가면 간단한 피나 소변 검사, 엑스레이 등을 찍을 수 있다.
개업의들은 근처의 병원과 계약을 맺어 필요하면 환자를 그 병원에 입원시키고 진료를 할 수 있다. 종합병원에는 월급을 받는 의사들도 있다.
산재전문 의료진들에게 산재 보험사는 큰 고객이다. 환자를 보내주고 제때 의료비를 지급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디컬 그룹이나 병원들은 마케팅 매니저를 두고 보험사 직원들에게 영업을 한다. 아침이나 점심을 케이터링 해서 사무실까지 와서 각종 부상과 이에 따른 효과적인 진료나 새로 나온 약과 검사 장비를 소개하는 세미나 등을 제공하기도 했다. 회사의 입장에서는 무료로 대접받아 가며 직원 교육을 시키는 셈이다.
사무실 근처의 식당에서 점심이나 저녁을 대접하기도 하고 일과 후나 주말에 스포츠 경기나 콘서트 장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선물이나 기프트 카드 등을 돌리기도 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온갖 먹거리와 선물들이 들어왔다.
내가 보험 조정관으로 일하며 경험했던 이런 마케팅은 9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산재보험기금은 구조가 일반 보험회사와 같고, 국민이 내는 세금을 받아 예산을 집행하지 않고 보험금을 받아 운영하여 넉넉한 재정으로 그 정서가 사기업에 가까웠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로 인한 부작용도 있었다. 일과 후 술을 먹고 직원들끼리 부적절한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주말에는 사용할 수 없는 회사 차를 몰고 이런 자리에 갔다가 사고가 나서 징계를 받은 직원들도 있었다.
90년대 중반 사장단이 바뀌며 정화운동이 벌어져 모든 향응제공이 금지되었다. 하다못해 판촉 용으로 돌리던 볼펜이나 수첩 따위도 모두 돌려보냈다.
70-80년대 한국에서는 공무원의 뇌물이 관행이 아니었나 싶다. 갈빗집을 하시던 부모님은 군청이나 세무서에서 누군가 나오면 식사대접은 물론 돌아갈 때 꼭 돈 봉투를 주곤 했었다. 매 학기 어머니는 동생들의 학교로 담임 면담을 다녀왔는데, 이때도 봉투를 들고 갔다.
미국에 오기 위하여 여권을 신청하니 경찰서 사찰계 형사가 신원조회를 나왔다. 나는 죄를 지은 적도 없고 범법행위를 한 적도 없지만 면담을 나누고 돌아가는 그에게 교통비라며 봉투를 주었다. 늘 그런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에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미국에서 공무원 뇌물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이민 초기에는 한국 정서에 익숙한 이민자들이 교통위반을 적발하는 경찰에게 꼬깃하게 접은 돈을 운전면허증과 함께 건네다가 뇌물수수죄가 추가되어 법정에 가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고 한다.
나도 한두 번 뇌물의 유혹을 받았던 적이 있다. 한국말을 한다는 이유로 한인봉제협회의 산재보험을 담당했던 적이 있었다. 하루는 임원 중의 한분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그는 나에게 편법이라도 산재보험료를 절약할 수 있는 길을 좀 알려 달라고 했다. 그만한 대가는 주겠다는 언질도 했다. 나는 그에게 합법적으로 보험료를 줄일 수 있는 방법 외에는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점을 확실히 밝히고 나왔다.
마사지 시술소를 운영하는 한인 여성의 종업원이 산재를 입고 그녀를 상대로 고소를 했다. 업소의 여주인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말이 마사지 시술소이지 음성적으로는 성매매를 하는 업소였다. 그녀는 그런 업소를 여럿 가지고 있었으며 부촌인 ‘팔로스 버디스’에 집을 가지고 있었다. 필요한 내용은 다 파악을 해서 일이 끝났는데, 그녀는 자꾸 산재보험이 부담이 된다고 불평을 하며 따로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틀림없이 무언가 청을 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몇 번의 전화에 핑계를 댓더니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빠듯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누군가 돈을 건네며 불법적인 부탁을 했더라면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