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여동생이 중학생 때의 일이다. 아르바이트로 영어를 가르치려고 했는데 쉽게 학생을 구할 수 없었다. 그 무렵 과외공부나 가정교사는 주로 대학생들이 도맡아 했다. 내세울 학력이 없는 내가 자력으로 학생을 구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동생이 함께 과외수업을 받을 친구를 하나 소개하여 주었다. 마침 수학을 가르칠 사람은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친구가 ‘채수안’이다. (오래 전의 일이라 이름은 가물가물하다) 몇 달 동안 나는 영어를 그는 수학을 가르쳤다. 얼마 후 동생의 친구가 그만두며 과외공부도 없어졌다. 과외를 그만둔 후에도 그는 가끔 나를 찾아왔다. 나와 바둑을 두기 위해서다.
학력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나이는 먹어 가는데 내세울 학력이 없다는 것은 내게는 큰 콤플렉스였다. 제법 영어를 익힌 후이기 때문에 미국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전화번호부를 찾아 훌브라이트 장학재단에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카운슬러를 바꾸어 달라고 해서 내 사정을 설명하고 도와달라고 했더니 긍정적인 답을 받았다.
‘그리어’라는 이름의 카운슬러였는데, 그녀의 도움으로 용산에 있던 미 8군 교육센터에서 미국고등학교 졸업자격시험인 ‘GED’ 시험을 보게 되었다. 영어, 과학, 사회, 수학 등의 과목이 있었는데, 수학은 그 무렵 내게는 벅찬 내용이었다. 당장 수학 과외수업이 필요했다.
함께 과외공부를 가르칠 때 수학을 담당했던 채수안에게 부탁을 하자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신문을 보고 몇 군데 전화를 해서 수학선생을 찾았다. 남자보다는 여자가 나을 듯싶었다.
그렇게 해서 연세대학 간호학과에 다니던 여학생에게 (그녀의 이름은 벌써 오래전에 잊었다) 수학 지도를 받게 되었다. 몇 달간의 과외공부 덕에 시험에서는 합격점을 받았다.
난 은근히 그녀와의 인연이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시험이 끝나고 과외를 마칠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그녀가 오던 날 채수안이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내가 그동안 그녀에게 수학 교습을 받으며 자기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다소 불쾌감을 내비쳤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만들어낸 기억 일수도 있고)
'몇 학번이며, M.T. 가 어쩌고, 동아리가 저쩌고' 등 그들에게는 내가 끼어들 수 없는 공통의 관심사들이 있었다.
평소 같으면 바둑을 두고 천천히 밥도 먹고 갔을 텐데 그녀가 가겠다고 하자 그도 따라나섰다. 남자의 본능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일이 꼬여 간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내가 나서서 막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둘은 함께 돌아갔고 그게 내가 그들을 본 마지막이다. (내 기억에는 그렇게 남아있다)
그날 벽제 근방에서 누군가 우주선에 납치되었다는 소문이 없었던 걸 보면 두 사람이 잘 돌아간 것은 분명하다. 그날 채수안이 그녀에게 작업을 걸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뿐이다. 나와 연락을 끊은 것을 보면 둘이 한동안 사귀었을 것 같기도 하다.
둘이 잘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한 사람이 상처를 남기고 떠나갔는지 알 길은 없다. 그때 알았다. 세상에 인연이란 따로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의 인연이란 마음먹은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